며칠동안 이어진 평지가 끝나고 기나긴 산길을 만나다.
위에씨라고 하는 도시에서 만난 친구들.
친구들과 함께 공산당 기념관도 가고 공연도 갔다.
함께 간 공연에서 엔딩곡으로 대장금의 ‘오나라’가 퍼졌다.
그들은 알고보니 공연과 함께 물건을 파는 ‘약장수’들이었다.
친구들에게 중국인의 ‘싸가지’를 듣다.

며칠 만에 나타난 산악지대. 설마설마했는데 길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평지길은 끝나고 고생스런 산길의 시작
평지만 보다 산골로 들어오니 힘들긴 해도 시원하고 풍경도 좋았다.
그리고 점점 더 깊어졌다.
낯선 풍경이 마냥 신기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몇 번 반복했더니 녹초가 되었다. 조금씩 여행자 체형으로 변해가던 나.

정신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이게 마지막일거야 하는 느낌의 오르막도 있었지만, 언제나 오른 후에는 기막힌 첩첩산중의 모습을 펼쳐 보여주었다. 산중 평지에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고, 기력이 쇠한 상태라 좋은 숙소를 찾았다.

 길에서 파는 돼지고기를 말도안되는 싼 가격에 한봉지 사서는 체력보충을 했다. 밥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루를 충분히 쉬었다. 힘든 산 중 주행을 많이해서인지 다음날 아침에도 피로는 풀리지 않았고, 출발하자마자 또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도 별볼일없는 도시에서, 비싼 숙박료를 치르며 하루를 머물 수는 없어 짐을 챙기고 호텔을 나서려는 순간, 카운터에서 불러세웠다.

“!#@^@%$&*^%$*&%#&*@$”

“워 팅뿌동 쭝원”(중국어 몰라요)

“워 쯔다오 !@#%^@&#&*#^%$^@#%&*^%$”(알아요! !%^%&*^%#%$@)

 중국어로 무어라 얘기를 많이 했다. 젊은 친구들이라 귀찮아하지 않고 사전을 꺼내들고 대화를 시도해본 결과, 하루를 더 보내며 자기들과 놀다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름은 ‘따오먀오’, 나이는 20살에다 부모님을 도와 호텔일을 하고 있었다.

 ‘岳西革命烈士紀念館’(위에씨혁명열사기념관)에 함께 가게 되었다. 입구에 붙은 푯말을 보고 이 작은 마을에서 무슨 혁명이 일어났을까, 어떤 것이길래 기념관까지 거창하게 세워놨을까 생각했다. 기념관 입구까지 걸어갔지만 문은 닫혀져 있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날씨가 흐린 탓에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그곳은 그 도시 ‘위에씨’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생각보다는 크진 않았지만, 산으로 둘러쌓여져 있고 공기가 깨끗해 살만한 곳 같았다. 한국 연예인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역시나 ‘따창진’(대장금)이 주를 이루었다. 그쪽으로 관심이 거의 없었기에 긴 대화로 이어질 수 없어 아쉬웠다. 돌아나오는 중에 기념관 문이 열렸고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 혁명이라는 것이 ‘공산당혁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1920~30년대에 일어난 중국내 공산혁명, 그 지역에서 활동했던 ‘열사’를 기리는 그런 장소였다. 미국의 사주를 받던 부패한 국민당 정부를 대항하여 싸웠던 그들의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소상하게 적혀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쁘다고만 배워왔던 ‘공산당’, 새삼 중국이 ‘공산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나라라는 것을 느꼈다. 사실, 크게 와 닿은 것은 없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이나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은,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등의 초기 이론가가 세운 것과 완전 다른 것이라는 것도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다.

친구들과 솔 숲에서 한 컷
공산당 기념관 안에서 한 컷
기념탑 앞에서 한 컷

 저녁에 공연이 있는데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ok’했다. 이 조그만 시골도시에서 무슨 공연일까 하루 종일 기대했다. 저녁이 되어 그들과 함께 공연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무래도 유명한 가수가 방문한 것 같았다. 초대권이 있었던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입장하여 앞부분에 앉을 수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직각형태의 의자였는데, 오래되어 그런지 막써서 그런지 진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1층과 2층의 자리가 모두 메워진 뒤에 공연은 시작되었다. 어느 말 잘하는 남자가 진행했다. 인도풍의 춤을 추는 여자들, 현대적인 춤을 추는 여자들이 나온 뒤에 메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출연했다. 친구는 귓속말로 조금 유명한 가수라고 얘기했다. 생긴 것도 좀 괜찮고 복슬복슬하니 인기가 있을만 했다. 노래를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지만 공연장 분위기 자체가 흥미로워 불만은 없었다. 어린시절 우뢰메를 보던 극장을 연상케 했으니까.

 갑자기 사회자의 언성이 높아졌고 무엇인가 적힌 탁구공을 던졌다. 그리곤 탁구공을 받은 사람들을 앞으로 불러내고는 적힌 내용에 따라서 상품을 쥐어줬다. 아주 비싼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황스러웠다. 곧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공연을 했던 사람들이 물건이 한가득 담긴 수레를 하나씩 끌고나왔다. 사회자는,

“!$^@$*&%^&@^!%!^&@*^#~$!%@^#T*&%#^&$@^#!%~$”

라고 얘기했다. 대강 분석해보니 ‘아주 고가의 시계가 특별히 오늘만 100원입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한국이었다면 육두문자를 내뱉고 나갔을 상황이었지만, 이런 분위기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직 불만을 일으킬만한 것은 아닌 듯 했다. 저걸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했지만 끌고나온 수레의 물건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정신없이 사갔다. 순간 하나사서 친구에게 선물로 할까 생각했지만 ·100원은(13000원 정도) 나에게도 큰 돈이라 이내 단념했다. 대장금의 ‘오나라’ 노래로 마무리 하며 공연? 장사? 는 끝이났다.

 공연이 끝나고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카운터에 함께 앉아 이야기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사람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크게 고민해볼 거리가 생겼다.

 늦은 시간에 손님이 왔다. 손님은 방이 있냐고 묻고 다시 얼마냐고 물었다. 체크인을 담당하던 친구가 인터넷을 하면서 대답을 했다. 70원이라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야기를 해서 내가 당황을 했지 그 손님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비싸다고 이야길 했고 깎아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친구는 여자다) 여긴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에어컨도 있고, 깨끗하다고, 못 깎아준다고 대답했다.

그 손님들 3명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묵겠다고 얘기했다. 그 때까지 친구의 눈은 거의 컴퓨터로 향해있었고 손님들은 쳐다봤는지 안쳐다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손님들은 100원짜리 지폐를 건냈고 친구는 그 돈을 받고는, 카드키를 ‘리더기’에 한번 읽히고 그것을 탁자위에 휙~하고 던져버렸다. 잔돈도 꺼내서 거기다가 던져버렸다. 나는 손님들도 관찰했다. 그런데 불만같은 것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도 그렇고 손님도 그렇고 그런 상황에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한국인인 나로써 이해하기 대단히 힘든 부분이었지만, 그게 그들이었다. 타인 간의 ‘예절’은 한중일 중 한국이나 일본에서 정의될 뿐 중국에서는 그 개념조차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예절’이 나름 꼼꼼하게 정의되던 사회에서 살다온 나라서 그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있는게 좋은 것인지 없는게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 졌다. 같은 유교문화권인 한중일 인데 이렇게 다른 것이 왜일까 생각해보았다. 기초지식이 전무한 나로써 판단할 수 있는건 언어였다.

한국과 일본. 특히 한국은 존댓말, 높임말, 반말 등이 발달해 어린아이 외에는 거의가 존댓말 이상을 사용해야 하고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놓자’고 하기 전에는 편한 말을 하지않는다. 반면에 중국은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말을 할 때나 어른이 어린이에게, 타인이 타인에게 말을 할 때 그런 ‘법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번은 길가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고 있는데 10살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아이가 뒷짐지고 다가와서는 거만한 표정과 함께 턱을 들어올리며 ‘니스날리아?’(어디서왔어? 어디사람이야?) 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 순간에는 ‘이 꼬맹이가 팍 쥐어박아뿔라, 내가 니 친구가!’ 라고 입구녕까지 말이 올라왔다가 ‘중국이지…’하고 참았던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존댓말을 쓰면, 반말만 쓸 때보다는 약간의 거리감과 최소한의 예절 이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런데 그 존댓말이 깨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황에 따라 더 친해지거나 싸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의 ‘보통화’(북경말)에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언어를 통해 나타나는 예절은 비교적 덜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예절’ – 내가 정의하는 그런 예절 -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그런 언어 때문에 ‘싸가지’가 없어진 것일까,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 언어가 생긴 것일까. 친구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공산주의가 사회이념으로 채택된 이후 평등사상이 강조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몇천년동안 이어지는 민족의 성향이 불과 50여년만에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날 다소 아쉬운 작별을 했다. ‘따오먀오’가 나에게 애틋하고도 아쉬움이 한가득 담긴 미소를 계속 보냈기에. ‘그래도 가야지, 우리 어머니께서는 중국여자는 안된다고 하셨거든.’(속으로) 다음날 아침 140원의 숙박료를 30원이나 올려 170원 받은 친구의 어머니가 미웠지만, 따져서 좋았던 관계가 틀어질까 그냥 지불하고 나왔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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