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싸람을 경유하여 바라나시로 향했다. 생각만해도 두근거리는 도시 바라나시. 뭔가 모르지만 책이나 각종 다큐를 통해서 그 유명세가 몸에 베어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2번 국도를 따라 신나게 달렸다. 서풍이 강하게 불고 있었지만 이상한 마력이 끌어당겨 크게 힘이들진 않았다. 늦지 않은 시간에 강가(갠지스강)에 닿을 수 있었다. 큰 다리위에서 보이는 바라나시는 그야말로 차분한 도시였다. 강 위의 조그마한 배들이 가느다란 물살을 가르며 다니고 있었다.
나의 숙소는 ‘히라시찬드라 가트’ 라고 하는 화장터 바로 옆 이었다. ‘가트’란 목욕계단을 의미하지만 ‘마니카르니카 가트’와 ‘히라시찬드라 가트’ 는 화장용 가트였다. ‘마니카르니카 가트’는 이곳에서 제일 큰 화장터이고, ‘히라시찬드라 가트’는 그 다음가는 화장터이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겅가(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묵은 업장(業障)이 씻겨진다고 믿는다고 하며,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겅가에 뿌리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매년 100만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해 목욕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화장된다.
숙소 옥상에는 식당이 있는데, 밥을 먹으며 창밖 아래를 보면 화장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방에 있으면 어김없이 ‘람람(선창) 사따해(다같이 후창)’ 라고 하는 장례행렬의 어떤 구호를 들을 수 있었다. 가트를 산책을 하려면 반드시 화장터를 지나야 하고 숙소에 돌아오려면 반드시 화장터를 지나야 했다. 한국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누가 과연 화장터 옆에서 자려고 하겠는가. 아니 누가 숙소를 지으려 하겠는가.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리고 육신이 사라지며 그 영혼이 빠져나온다면 방황하는 영혼들이 내가 묵은 이 숙소근처에 가장 많을테니까. 무서움이 많은 나에게, 특히 전생이나 사후세계를 약간 믿는 경향이 있는 나에게 있어 이곳 숙소에 묵는것은 상당한 곤욕이었다.
해질무렵 화장터 벤치에 앉아 화장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네팔의 ‘파슈파티 힌두사원’ 옆의 ‘바그마티강’ 옆의 화장장에서도 지켜본 적이 있긴하지만, 그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좋은 방법은 부딪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네팔에서 본 화장의식 때문에 몇일동안이나 밤잠을 설쳤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무서웠다.
장례행렬이 들어왔다. ‘람람’하고 누군가 선창하면 ‘사따해’하고 장례행렬 모두가 후창을 했다. 우리의 ‘이제가면 언제오나’하고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정확한 뜻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선창의 ‘람람’은 사람마다 다른말로 바뀌는 것으로 봐서 사람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후에 물어보니, 람(람이라는 신)도 죽는데 무슨 걱정이냐! 하는 뜻이라고 했다)
‘가트’에 도착해서 바로 겅가로 가서 몸을 씻겼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고인을 담그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중요한 부분의 천을 벗겨 세심히 씻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업을 겅가에 깨끗이 씻고 천상으로 보내려는 의도 같았다. 솔직히 사람마다 성의가 천차만별이라서 어떤사람은 ‘와~ 저건 너무한다’ 한 것도 있었고, 깨끗이 씻는 사람을 보면 ‘되게 가까운 사람이고 많이 사랑했나보다’ 생각했다.
그런 후에 고인을 바닥에 누이고 뭔진 모르지만 장례객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든 사람이 몇발짝 떨어져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고인 얼굴에 덮여져 있던 천을 벗기고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직계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고인 얼굴 바로옆에 쭈그려 앉았고 다른 장례객들은 주변을 둘러쌌다.
그 가족 중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고인은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어머니에게 끌려가 ‘아버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 꼬마의 표정은 도대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슬픈표정, 무서운표정, 싫은표정, 멍한표정 등등 다양표정을 한번에 내보이고 있었다. 그 아이를 지켜보면서 나역시도 찝찝한 상태가 됐는데, 사진을 찍고 난 후 그 고인의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는 울분을 토하며 울었다. 그러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고,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슬픈데 외국에서 온 내가 지켜본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갔고, 돌아가는길에 그 아주머니와 고인을 보았다. 순간 느낀것은 마치 산 사람같다는 것.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딜 간단말이고.. 여보.. 눈좀 떠보소.. 여기 아들래미, 딸래미 얼굴좀 보소.. 우리는 우짜고 혼자 간단말이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남편이 이제 곧 불속으로 공기속으로 녹아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하는지 조금은 궁금해서 숙소 옥상에서 내려다 봤는데 한~참동안 아주머니는 고인을 놓지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 후로도 숙소를 오가며 많은 화장을 보았다. 조용히, 그리고 시끄럽게 타들어가는 시신들. 남는 것은 연기와 재밖에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시신들이 태워지지만 태워도 태워도 그 자리에 있던 숯과 재들을 강물로 밀어내기만 하면 자리가 생겼다. 세상사람들 다 타도 그 자리는 언제나 다음사람을 기다릴 것 같았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