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삶을 꿈꾸던 우리 부부는 아기가 생기면서 출산을 스스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스스로 출산을 하지만 오직 사람만이 병원에서 출산을 하는데 의문을 던졌죠. 출산에 대한 공부와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실행했습니다.
하하농장의 첫번째 ‘하’의 주인공 모하는 2013년 12월 17일에 작은 시골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건강하게 낳았고, 9살인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다큐를 만들고 싶어서 영상도 찍고, 글도 써 놓았으나 결국 제 때 쓰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서야 글을 꺼내 놓습니다. (그 때 써 놓은 글을 아주 살짝만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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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의 가정출산 이야기 #2
불같이 화내시던 어머니
“느그가 아를 집에서 낳는다고?! 집에서 아 낳는다고… 그..그라면 니 안볼끼다이, 알아서 해라”
어머니의 흥분한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절대 안된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보지않을 거라는 말은 빈말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말 아닌가.
흥분한 어머니에게
“엄마도 내 집에서 낳았다이가. 옛날에는 집에서 다 낳았는데 뭘.”
대수롭지 않은 척 설득했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옛날하고 지금하고 같나! 이놈아. 안된다. 절대 안된다이.”
완강한 어머니의 반응에 내가 더 고집을 부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한 발 물러섰다.
“알았다. 알았다. 안동에 가면 병원 있으니까 거기가서 낳지 뭐…” 하며 흥분된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아마 어머니도 병원에 가서 낳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어머니 입장에서 마음에 들게 행동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왔고, 어머니는 싫은 내색을 하시면서도 끝까지 말리진 않았다.
임신 초기에는 이 정도 반응까지는 아니었다. ‘안된다’정도로 넘어갔지 ‘안본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늘 “병원에는 가봤나?”하고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임신을 처음 확인할 때만 병원에 갔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굳이 병원에 가 불필요한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로써는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먹고 잘자고 잘싸고 잘움직이면 되리라 생각했다. 검사를 받았다가 아기가 장애가 있다거나 하는 말을 들으면 걱정만 늘어날 것이었다. 이상이 생기면 그 때 병원에 가면 될 일이라 여겼다.
유하 지인도 임신 도중에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장애아일 가능성이 높다며 낙태를 권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기가 불쌍해 낙태를 하지 않았고, 출산 때까지 온갖 근심걱정을 달고 살았다. 정상적으로 출산을 했고 태어난 아기도 지극히 정상이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물음에는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보건소에서 한 달에 한 번 오니까 그 때 가면된다.” 어머니는 나의 저의를 알아챘는지 “그래 꼭 가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곤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낳을 때가 다 되어선 화가 나신거다.
집에서 나를 낳은 어머니, 그것은 슬픈기억.
어머니는 나를 집에서 낳으셨다. 낡은 5층짜리 아파트.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사를 갔으니 만 34년도 넘게 살고있는 곳이다. 그 집에서 가장 넓은 방에서 태어났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 욕실과 마주하고 있는 벽에 기대어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와 9살 차이가 나는 큰 누나만 집에 있도록 하고 당시 5살, 3살이었던 둘째, 셋째누나는 놀이터에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 딸을 내리 낳는 바람에 또 딸일까봐 병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거사를 치른 것이다. 그렇다. 누나들은 다 병원 또는 조산원에서 낳았다. 딸이라도 자식인데 왜 병원에 가지 못했는지, 아들이 뭔지 참 안타까웠다.
큰누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잔 신부름을 했다고 한다. 수건이나 물, 가위 따위를 나르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누나는 그 때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옅은 사진처럼, 그것도 한 장 정도만 남아있다고 했다. 나와 유하가 가정출산을 마음먹었을 때만해도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집에서 낳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반대로 집에서 낳은건 어머니 입장에서 슬픈 일이었지 기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조금 다른 처가댁 상황
처가댁은 상황이 달랐다. 나와 다르게 유하는 장모님께 통보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가정출산의 경우도 그랬다. “엄마. 우리 아기 집에서 낳을거야” 이랬더니 장모님은 “야. 너희가 어떻게 집에서 아기를 낳니?” 하고, 유하는 “몰라, 집에서 낳을거야”하는 식의 대답이었다.
장모님은 그 말을 듣고 근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변했는데 유하는 병원출산의 현실이라든지 가정출산이 좋은 점이라든지 그간 공부했던 내용들을 장모님께 쏟아부었다. 유하나 나나 결국에는 본인이 원하는대로 결정하는 건 같은데 나 같은 경우는 허락을 구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유하는 거의 통보에 가까웠다.
장모님은 유하가 원하는 일은 대부분 밀어주는 스타일. 결국엔 “그래, 너희 알아서 하는데…”하시며 조건을 달았다. 위험할 때는 꼭 병원에 가라거나 안되면 집에 올라오라거나 하는 등 염려스러운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권리
가족들의 허락을 구하는 것 외에 주변 사람들의 눈치도 보아야만 했다. 가정출산이라는 건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개념이나 마찬가지. 아마 사람들 머릿속에는 ‘옛날에는 아기를 집에서 낳았다지’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고 있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조산원에서 자연스러운 출산을 선택하고 있다. 산부인과로 급히 후송되던 산모가 응급차에서 아기를 낳았다거나 아니면 택시에서 낳았다거나 드물게 섬에서 빠져나오던 헬기에서 낳았다는 뉴스가 보도되는 걸 보면 꼭 아기는 산부인과에서 낳아야 한다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인 것 같다.
한번은 우리보다 한 해 일찍 아기를 낳은 친구를 만나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제수씨는 계획대로라면 아기를 조산원에서 낳으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예정일이 다가와 순산을 위해 집에서 멀지않은 직장에 걸어서 오갔는데 그것이 자극이 되어 양수가 터져버렸다고 했다.
출산을 준비했던 부천의 조산원까지 가지 못했고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낳았단다. 그 산부인과에서는 산모들이 흔히 겪는, 피하려고 했던 상황들을 다 겪었다고 했다. 출산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봐도 병원의 의료조치들이 산모나 아기들의 건강에 꼭 좋은 작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란걸 알 수 있다. 제수씨는 표정에 아쉬움이 역력했고 우리도 함께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유하씨는 어디서 낳을거에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 때가 추석이 지난 뒤 바로 였으니 임신 7개월정도였다. 우리 마음 속에 ‘가정출산!’이 명확히 그려져 있던 시기.
유하가 말했다. “집에서 낳을거에요. 근처에 조산원이 있으면 당연히 가서 낳을텐데 주변에 없어요”
친구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놀라며 속으로 ‘제수씨만 출산 공부했구만!’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조산원 분만을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가정분만도 한번쯤 생각해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친구는 아쉽게도 바쁜 나머지 출산공부는 하지않은거 같았다.
며칠 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아 낳다가 잘못되면 큰일난다이가. 아니면 조산원에서 낳든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였다. 걱정을 안했다면 전화도 안했을 터. 아기아빠가 된 친구는 아기를 낳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알고 있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이미 아기는 독립된 생명체고 그 책임은 부모의 선에서 이미 떠나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갔다. 우리도 아기는 처음 생겼을 때부터 독립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친구는 이제 독립적인 생명이 된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날 권리가 있으니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한 병원에서 출산해야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독립적인 생명을 자연스럽게 낳을 권리, 아니 자연스럽게 나올 권리를 뺏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낳기위해 임산부 신체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작용들, 또한 아기의 작용들을 몇몇 약품들이 망쳐놓는 일이야 말로 책임질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 시술로 태어나는 아기의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것만 보아도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설마 우리 인간이 그 정도로 자연출산능력이 떨어지겠는가. 안타깝게도 친구의 말대로 우린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근거없는 자신감, 걱정을 부르다.
이런 걱정은 다른 사람들도 한가득 하고 있었다. (전)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갔을 때였다.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출산경험이 있는 선배들은 걱정스런 눈빛을 쏘았다. 페이스북에 유하가 올린 글을 봤던 것이다.
“성만씨, 진짜 집에서 아기 낳을거에요? 와.. 멋지다. 근데 꼭 비상 상황에는 대비하셔야 해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구급차를 불러놓고 아기를 낳는건 어때요?”
이러면 나는 늘 말문이 잠깐씩 막혔다. 나는 경험이 전무했고, 그들은 한 명이나 두 명 아기를 낳아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안동 병원에 얘기해놓고 위험하면 바로 차로 가려구요.”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런 대답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최소한 나는 산모를 돌보아야 하고, 운전은 다른사람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백번 수긍이 갔다.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가정출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유하는 마냥 자신감이 있었고, 나는 조금은 불안해 하면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10년 전 유라시아 자전거 여행을 준비할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비행기로 가도 사람 안사는 지역을 몇 시간씩 날아가는데 어떻게 거길 자전거로 간다는 거에요? 테러도 많이 일어나는데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예..그냥 뭐.. 가다가 안되면 자고.. 테러지역은 피해서 가죠.”하는 식으로 얼버무렸었다. 실은 어떻게 대처하겠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다만 극소수이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여행한 선례가 있었고 ‘나도 할 수 있다’같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때는 내 목숨이 달린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아기와 산모의 목숨이 달렸다는 것이 좀 달랐다. 마냥 ‘자신감’으로만 밀어붙일 수 없는 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