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강하고 습할 수록 힘들다. 그런 날 오후엔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많이 내렸다. 하늘이 꾸물꾸물해지고, 천둥소리가 들리면 일을 접으면서도 약간 신난다. 어쩔 수 없이 멈출 수 있다는 것과 소나기가 가져다주는 시원함 때문이다.  소나기는 여러모로 아주 반가운 존재다.

뜨겁고 힘들었던 그날도 어김없이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쳤다. 집 근처 하늘에서 번개가 바로 내리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숲 속이 훤히 보일정도로 번개가 쾅쾅거렸다. 가지고 있던 삽을 냅다 던지고 도망가듯 집으로 갔다. 눈 앞에서 번쩍거리는 번개를 처음본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정육점 현장으로, 아내는 축사로 향했다. 한 삼십분 쯤 지났을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야, 돼지들 물이 안나와! 큰일났어” 정말 큰일이었다. 더운 여름에 물을 못마시는 건 대형사고였다. 이웃농가 고마워돼지농장 희규씨가 “형님, 돼지들 밥은 못먹어도 괜찮은데, 물을 못마시면 기를 쓰고 탈출해요.” 라며 물의 중요성을 얘기했었다. 들고있던 망치를 던져놓고 일단 뛰었다. 먼저 지하수 펌프를 살폈다. 빗물이 펌프실 내부로 유입돼 고장났나 싶어서다. 뚜껑을 열어보니 뽀송뽀송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축사 복도를 통과하며 전선을 살폈지만 별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물꼭지 아래에 물이 말라 있더라고”하며 달려왔다. 돼지들은 물을 흘리며 마시기에 늘 흥건하게 젖어있다. 다들 나를 노려보며 화난 “꿀” 소리로 항의했다. 마음이 더 바빠졌다.

일단 차단기가 내려가있기를 바라며 차단기로 향했다. 차단기가 내려가 있으면 올리면 그만인 일이다. 다른 곳이 문제라면 문제를 찾기위해 곤욕을 치뤄야한다. 단자함을 열어보니 고맙게도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다. 어제 번쩍거리던 번개에 내려간 것이다.

물이 나오기 시작하자 밥통에 가득한 사료는 제쳐두고 수돗가로 몰려들었다. 가뜩이나 잦은 ‘공격’으로 약해진 파이프가 걱정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목마른 돼지가 한 두마리가 아니었으므로 파이프가 위태로워 보였다. 급하게 고압살수기를 동원해 돼지들을 향해 ‘안개모드’로 분사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마른 입을 적셨다. 고비를 넘겼다.

그 다음 사고가 나기까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이던 그 수도꼭지는 괜찮았는데, 맞은편 방에 멀쩡하던 파이프가 부러져버렸다. 이 날도 나는 정육점 작업을 하던 와중에 호출이 됐다. 아내는 호수, 목욕탕 같은 단어를 연발하며 빨리 오라고 했다. 도착해서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도대체 얼마동안 물이 나와야 저렇게 찰 수가 있는지! 50평 쯤 되는 공간인데 절반 정도가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차 있었다. 아마도 전날 오후 늦게부터 터진 게 오늘 아침까지 계속 나왔나보다.

물이 많다고 모두가 목욕을 즐기는 건 아니었는데, 유독 한 마리가 가운데서 몸을 푹 담그고는 하마인 척 하고 있었다. 파이프를 부러뜨린 돼지가 바로 저 돼지가 아닐까 의심이 되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자재상에서 파이프를 사다가 일단 주먹구구식으로 고쳐 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돌아보니 나머지 돼지들도 물 속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잘 된 일인가?)

며칠 뒤 사고가 또 터졌다. 한여름이 시작되고 세번 째다. 이번엔 물이 안나오거나, 터진게 아닌 정신이 잠시 잠깐 탈출한 사고다. 더위 때문에 판단력이 대단히 흐려졌다고 핑계를 대본다. 사고인 즉, 사료 주문을 못했다. 아니 안했다. 사료가 떨어져가는 걸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날짜를 넘겨버렸다.

평소같으면 다 떨어진 그 날이라도 정미소와 사료회사에 다녀오면 끝나는 일이다. 그런데 장마에 휴가철이 겹치니 일이 꼬여버렸다. 일주일 내내 내리던 비는 발목을 잡았고, 비가 끝나고 나니 정미소가 휴가라 문을 닫아버렸다. 이 때 휴가라고 미리 들었는데도 기록도 안하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큰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배고파서 난리칠 돼지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까운 이웃농장에 SOS신호를 보냈다. 역시나 몇 년 선배라 달랐다. 여름철에는 미강이 부족한 시기라며 넉넉히 준비해놓고 있었다. 고마워돼지농장 무훈형님은 흔쾌히 미강 500kg을 빌려주었다. 유기농 사료는 비가 그친 다음에는 문제없이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천둥번개는 금속으로 된 전선에 언제나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번개를 맞지 않더라도, 또 세찬 비 때문에도 누전이 일어날 수 있다. 그날 바로 앞에서 불빛이 번쩍거릴 정도면 누전을 의심할만 했고, 미리 점검을 했어야했다. 일반 돈사의 경우 이런 때를 대비해 비상용 발전기를 갖추어놓는다. 무창돈사는 환기 시스템이 멈추면 돼지들이 집단 폐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돼지 물꼭지는,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미뤄두고 있던 문제다. 파이프 위치가 약간 애매한데, 물꼭지 아래 고인물에 누웠다가 일어설 때면 파이프를 피하지 않고, 꼭 등으로 들어올린다. 조금씩 조금씩 들리던 파이프가 저러다 고장나겠지 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게 결국 터져버렸다. 다른 돈방의 파이프들도 썩 멀쩡하진 않다. 정육점을 다 짓고 나면 축사의 수도를 재정비 할 생각이다. 일단은 나무 파렛트로 파이프 뒤를 채워놓아 다시 들어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파이프도 짧게 연결해 쉽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료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흐려진 판단력’ 때문인 것 같다. 폭염에 아무리 잘 대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여도, 뇌가 한 박자씩 늦게 따라오는 기분이다. 게다가 정육점을 짓느라 축사에만 신경을 쏟을 수 없으니 더 그렇다. 무더위가 안 힘든 때가 있었나 싶지만, 이번 여름은 버퍼링 걸린 컴퓨터처럼 버겁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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