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자 숙소에서의 여행자들은 타지마할의 요금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너무 비싸서 선뜻 들어가기가 꺼려진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정도 가격은 지불해야한다는 의견. 그 중에 귀가 솔깃한 것이 이미 다녀온 사람의 표를 건네받아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 다만 그것은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배가고파 잠깐 슈퍼에 다녀왔다’ 정도의 핑계?를 대고 들어가야 한단다. 입장료가 그렇게 비쌀지는 예상을 못했지만, 정직하게 들어가는 게 맞았다.
비싼 타지마할 관람요금 750루피(17000원가량)을 지불하고 들어갔다. 소지품 검사에서 전자사전은 들고들어가지 못한다고해서 경비원들과 약간 실랑이가 있었다. 기분이 약간 상했지만 첫 번째 문을 통과한 후 나타난 넓은 정원은 그런 사소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다. 두번째 문을 들어섰다. 무슬림 건축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 아니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해서 너무나 감동적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찌된 것이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몰아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서 주변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아니 어찌 이렇게 정교하고 멋지게 지을 수 있을까. 흐린하늘이지만 은은한 우유빛의 타지마할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이 1631년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아내가 있었을 그로써 자신의 그 아내에 대한 애정이 장난이 아니었음이다. 1632년에 착공하여 매일 2만명이 넘는 인부들을 동원해 11년이 지난 1643년에 본 건물인 ‘영묘’가 완공되고 6년 후에는 부속건물이 그 5년 뒤에는 모든 것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22년동안 매일 2만명의 인부가 그곳에서 일을 했고, 돈으로는 4000만 루피의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가끔씩 보는 공사장 인부들, 도로공사장의 인부들을 볼 때, 심하리 만큼 놀고있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분명히 일하는 시간임에도 일하는 사람은 몇명되지않고 많은 사람들이 ‘노가리 까며’ 놀고 있었다. 임금이 적어서 그러는 것인지 대충봐도 그들로부터 게으름이 진하게 느껴졌다. 또한 아직 장비가 현대화 되지 않은 탓에 많은 부분 사람 손으로 직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 21세기에 그런 인도다. 그런데 16세기에는 오죽했겠는가! 이 거대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건물을 짓기위해 관리자들은 그들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응당 해댔을 것이다. 관리자들이 느긋느긋한 인도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또, 여기 건물들은 대부분 거대한 바위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바위들은 적색바위와 우유빛 대리석인데 이 주변에서는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멀리에서 하나하나 다 가지고 왔다는 말이 되는데, 이동수단이 발달해 있지 않았던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도 민심이 흉흉해졌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 사람들이 희생되었겠는가. 그렇게 크지않은(비교적!) 경복궁을 짓는데도 민심이 흉흉해지는데 이 타지마할은 오죽했겠는가.!
이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보면서 연일 혹독한 노동을 했을 사람들의 슬픈영혼과 샤 자한의 강력한 권력이 사정없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것에는 항상 슬픔과 고통이 따라야만 하는 것 같다. 고통속에서 훌륭한 예술가와 철학자가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배여야 아름다운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한발짝 한발짝 타지마할에 가까워 질 때마다 놀라움은 증폭되었다. 시야에서 타지마할이 차지하는 크기가 커질 수록 가슴은 더 넓게 벌렁거리고 심장박동은 빨라졌다. 신성시 하는 건물인데다,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매표소에서 미리 덧신을 내주었다. 멀리서 볼 때는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이 어떻게 이렇게 은은한 우유빛을 낼까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옥이었다. 무식한 내가봐도 그건 옥이었다.
‘무슨 이런 대리석이 다있나! 이건 옥이야 옥!!’ 살짝 투명한 옥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옥같은 대리석이었다. 도대체 이런 아름다운 돌을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지 그 고생이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돌의 표면도 맨질맨질 한 것이 마치 전기동력으로 움직이는 돌을 다듬는 기계로 다듬은 것 같은 느낌. 이것을 모두 손으로 했다고 생각하니. ‘대패로 돌을 갂진 안잖아.’
내부에는 석관 같은 것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똑같은 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리도 없었다. 아니!! 정말 이것 뿐인가!! 이것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후손들이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해 엄청난 관광수입을 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러니까 조상들의 희생에 대한 댓가로 후손들이 많은 수입을 들이는 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샤 쟈한의 다소 무모한 사랑?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그렇게 헛되지 않아 대단히 다행인 것 같았다.
푸른하늘과 뭉게구름 아래에 있는 또는 달빛아래의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감상하지 못해 대단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기한 감동을 한가득 끌어안고는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을 맛있게 해먹고는 출발을 했다. 하지만 출발하고 5분이 안되어 비와 우박이 섞여 쏟아졌다. 배수가 안되는 엉망진창의 도로를 상상하며 바로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 적은 량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관광지 ‘아그라 성’이나 기타 등등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하루종일 책이나 읽을 생각으로 ‘방콕’했다.
책을 읽다가 낮잠을 실~컷자고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운 태양이 햇볕을 어두운 방으로 쏘아주고 있었기에 얼른 밖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하늘!! 일주일 가까이 보지 못했던 파란하늘이었다. 파란하늘에 타지마할이 둥둥 떠다녔기 때문에 당장에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찍을 방법을 생각했다.
다시 들어가기엔 입장료가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그럴 순 없었고, 혹시나 해서 타지마할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야무나 강’쪽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서 나오는 어떤 외국인 말로는 지금 태양이 바로 역광이라 사진을 찍기에는 좋지않다고 했다. 그래도 한번 들어가서 찰칵. 그랬다. 안좋았다. 그 때 강 건너편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그곳의 소형배가 눈에 띄었다. 가격은 무려 50루피. 그곳사람들에게 저쪽 강건너로 어떻게 건너가냐고 물었고 20km를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건물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도 뜻깊은 일이었기에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20km는 껌이다. 짐을 싣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속 30km는 너끈히 나오기에 당장에 달려갔다.
강 건너에서 보는, 서쪽으로 도망가는 태양의 빛을 받아 붉은 빛을 내는 타지마할, 잔잔한 야무나 강에 비치어 두개나 된 아름다운 타지마할은 너무나 기가 막혔다. 강 건너에서 보는 쪽은 벽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타지마할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그곳에서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교통편이 불편하여 돈이 많은 인도인 가이드를 동반한 개인여행자 뿐이라는 사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나와 비슷한 배낭여행자들도 본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앞에서 보든 뒤에서 보든 흐린날에 보든 맑은 날에 보든 언제나 아름다운 타지마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홍보문구에 전혀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아니 그 표현을 좀 바꾸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증표’ 라고 하고싶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