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이길래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고타마 싯타르타’ 는 깨달음을 얻고난 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까. 그렇다. 나는 원래 불교신자도 아니고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기에 알지못하고, 한국과 떨어진 이 곳에서 이 물음을 답해줄만한 책을 찾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영화 ‘매트릭스’가 불교철학을 배경에 깔고 만들었다고 하기에, 1편에서 주인공 ‘니오’가 마지막 부분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스미스’ 요원 외 1명을 만났을 때 그들이 쏜 총알이 ‘니오’ 눈앞에서 멈추며 ‘매트릭스’의 실체를 보게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영화에서 나마 깨달음이 무엇인지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시어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시다가 고행주의로 전환하셨다고 한다. 그 고행을 보드가야에서 얼마 멀지않은 ‘등계수와거’산 동굴에서 하셨는데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수자타’라는 여인에게서 우유죽을 얻어먹고는 이곳 보드가야 ‘아사타’나무 아래서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7주간의 명상 이후에 ‘사르나트’라고 하는 마을에 가서 처음 설법을 하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각종 불교철학이론은 부처님 이전부터도 존재는 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크게 깨달으신 이후로 ‘불교철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세계각지로 포교되었고 지금의 서양 세계에도 불교는 널리 전파되고 있다. 그곳에선 서양얼굴을 한 각국의 출가스님도 눈에 많이 띌 정도였으니 몸소 체감할 정도. ‘진실한 세상’을 보기위해, ‘니오’가 되기위해.
부처님께서 역사적인 그 큰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BC 3세기에 아소카 왕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념하기 위해 사원을 건축했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무려 2500년 전의 일임에도! 마을 입구에 들어가면서 알수없는 선한 기운들이 마구 느껴졌다. 감동도 밀려왔다. 진실한 세상이 무엇인지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알 수가 없겠지만 하여튼.
수~많은 순례자들이 거리를 다녔고 특히 티베트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곳에는 티베트 피난민들을 위한 시장도 있었다. 중국사람들은 왜 티베트사람들이 피난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나 할까. 아니 살짝 고민이라도 할까) 중국사람도 많이 보였고 승복을 입은 승려들도 많이 보였다. 바라나시는 힌두 순례자들도 많았지만 관광객도 많았었다. 하지만 이곳은 관광객보다는 불교순례자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아니 순례관광객들이 많았다.
첫날은 숙소에서 그냥 보내고 다음날 아침 그 ‘보리수’ 가 있는 ‘마하보디사원’을 찾았다. 입구에서부터 구걸을 하는 인도인들이 줄지어 앉아있었고 그 맞은편에 동전을 파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사원 중심에는 커다란 탑이 있었고 그 둘레를 도는 사람들이 많았다. 녹음된 법문을 듣는 수많은 티베트 승려들이 앉아있었다. 탑 주변으로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 사람과 각종 외국인들이 많았다. 동양인뿐만 아니라 서양인까지.
그리고 얼굴이 검은 인도계열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 왕에 의해 아담한 사원이 이 자리에 지어졌고 2세기의 쿠산왕조 시기에 현재의 마하보디 사원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인 알렉산더 커닝엄씨와 미얀마 불교도들에 의해 사원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탑은 생각보다는 오래된 것 같지 않았고 현재도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불교 승려와 신도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성지 중 하나이므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 사원의 관리는 힌두교도들이 한다고 했다. ‘불교성지를 힌두교도들이 한다.’ 는 말은 정말 희한하게 들릴 수밖에 없지만 성지순례자들이 그곳 사원에다가 시주하는 돈이 어마어마하여 그 지역 권력을 잡고있는 힌두교인들이 관리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했다.(우리돈도 많이 나온다는 그곳 한국절 고려사 주지스님 말씀) 인도 불교도들이 그곳을 되찾으려 몇번을 시도는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안타까운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탑을 세바퀴 돌고는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다소 산만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를 즐기면서 탑 주변으로 앉아있는 승려들을 바라보았다. 집중이 잘 안되는 탓인지 법문을 듣는 승려들 중에는 ‘딴짓’하는 승려들이 많았다. ‘역시나 한국사찰의 분위기와 외국사찰의 분위기는 틀린거구나’ 하고 생각을 하며 ‘보리수’ 옆을 지나는데 순례를 오신 한국스님 몇분께서 참선을 하고 계셨다. ‘역시나 한국…’
그곳을 빠져나와 한국절에서 공양이나 할까해서 한국절 ‘고려사’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세계 각국의 불교사찰을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것이 티베트사찰이다. 그 이외에 태국, 미얀마, 일본, 대만, 중국, 몽골, 방글라데쉬 등등이다. 역시나 한국절도 있는 것인데, 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인도식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순례자, 여행자들을 위한 도미토리 방이 마련되어 있고 좌측 끝은 주방이다. 주지스님은 ‘월우스님’이고 살림은 ‘아마르’라고 하는 인도청년이 맡고 있었다.
부처님과 주지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점심을 짓는데 도와주고서 공양을 했다. 그곳에는 또다른 여행자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스님께 신세를 질 수 있느냐고 여쭙고는 바로 짐을 싸들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리곤 그곳에서 열흘 가까이 묵었다.
모두 기억은 못하지만 수많은 여행자가 그곳을 거쳐갔다. 하루만 묵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몇일씩 묵고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문에 간단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나 주지스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뜻깊은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주지스님 이외에도 다른 여러스님(법명을 여쭙지 못해 법명은 알지 못한다.)들의 말씀들, 정말 좋았다.
또한 관리인 ‘아마르’를 주축으로 여행자들이 음식만드는데 도와서 해야했다. 음식을 집에서도 거의 해본적이 없는 나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또한 김치가 다 떨어져 같이 장도 보고 김치를 만들었는데,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써는 너무 부끄러운 일. 음식은 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인데 한국사람이 한국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면서도 어이없는 일이다.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돌아갔을 때 다른것 모두 제쳐두고 어머니에게서 또, 요리학원이라도 다녀서 한국음식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 겠다.
저녁에는 절 마당에서 불을 피워 조용히 대화하며 여유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절에 있을때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무엇인가 하는 일도 있는것도 아닌데 머무르고 있어도 너무나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냥 조용한 풍경이 좋았고 공기와 기운이 좋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수행이 되는 것 같고 책을 읽으면 집중이 잘 되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마르’씨와 음식을 만들고 장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주지스님과 대화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그곳에 있는동안 부처님께서 우유죽을 드신 ‘수자타 마을’에도 다녀오고 6년간 수행을 하신 동굴에도 다녀왔다. 갈 시간이 다가오니 괜히 주지스님과 아마르씨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너무 여유를 부려버려 떠나야만 했다. 두분은 매번 이런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것 아닌가. 같은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고, 조금이라도 정이 들면 힘들 것이다. 여행이 끝나면 한국음식 잔뜩 싸들고 오겠다고 ‘아마르’씨와 약속한 후 떠났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