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쉬라즈의 시장.

국경을 가볍게 통과했다. 세관 내에 있던 직원은 나를 본척만척. 도장만 찍었으면 가라고 했다. 나로선 좋은 결과였다. 짐을 뒤집어 봐야 나만 피곤한 것. 그곳을 빠져나오니 너무나 깔끔한 도로가 나왔다. 파키스탄 측과는 극과 극의 대조였다. 기름이 좋긴 좋나보다.

이란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많은 기대를 해왔다. 어느 뉴스에서 미국에 대항하는 이란의 대통령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핵개발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미국에게 해볼테면 해봐라는 식의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그들에게 굽신거리고, 요구하면 하는대로,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그런 것이 너무 싫었다. 

어쩔 수 없다는 국제적인 흐름이지만 미국의 세계제패 야욕이 뻔히 드러난 상황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우리나라와 비교되며 이란은 마치 듬직한 큰 형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 이슬람 종교를 굳게 지켜가며, 아름다운 문화재를 지켜가며 많은 여행자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란이 너무나 기대되었다.

또, 수많은 여행자들로 부터 들리는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 집에 초대되고, 식사대접 받고, 그것도 모자라 선물까지 받는다고 그러지 않던가.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까진다고 하지만,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까지진 않을 것 같았다. 돈 많이 밝히는 중국땅에서는 많은 사람을 사겼지만 그들로부터 돈을 더 떼여 가슴 아팠고, 티베트에서는 조국을 잃은 티베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가슴이 아팠었고, 네팔은 썩어빠진 정부에 핍박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안타까웠었고, 인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러브콜로 골머리를 앓았고, 파키스탄도 마찬가지. 그런 아픔들을 이란에서 치유받고자 기대했다.

배가 너무 고프고 주행이 힘들었지만 거대한 기대감은 그것을 말끔히 잠재웠다.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풍경에다 역풍까지 거세 힘들었지만 그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첫번째 도시 자헤단을 그리며 젖먹던 힘까지 내었다. 얼마못간 곳에서 검문소를 만났다.

“~!$^&%$*#&@^!%^@%$^ 폴리스 &%*^&$^%@!%$@^#$@”

이렇게 말하며 경찰은 나에게 손바닥을 내 보이며 멈추라고 손짓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란 말 ‘파르시’였지만 ‘여기서부터는 경찰과 함께가야 한다’는 말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발레” (네)

파키스탄의 사막지역이 위험했던 것처럼 이곳 역시도 같은 이유로 위험했다. 몇번은 길을 지나던 여행자가 감쪽같이 납치되었던 적도 있었기에 몸과 다리는 자꾸만 자헤단으로 향했지만 그들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검문을 기다리는 차량을 상대로 쥬스를 파는 꼬마로 부터 곯은 배를 겨우 채우고선 기다렸다.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났다. 검문을 구경하는 것도 지겨워졌을 때쯤 사람들에게 경찰이 언제 오는지 물었다.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않고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곳은 이란이고, 그들은 이란 경찰이고 군인들이었기 때문이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또,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났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약간씩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다시 물었지만 손바닥을 내보이며 기다리라고 하는 행동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기다린지 다섯시간이 되었다.

제일 높아보이는 사람을 찾아 전화하는 시늉을 하며,

“콜 폴리스”

라고 얘길했다. 그는 무슨 황당한 얘기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랬더니 비슷한 행동일 뿐 특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찰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그들이었다. 어쨌든 나는 기다렸고 그것이 다섯시간이나 흘렀다. 자전거를 타고 갔다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이고 밥을 먹어도 두끼를 먹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가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콜 폴리스!!! 아임 웨이팅 파이브 아워!! 응??!”

또 배가 고픈 시늉을 하며

“아임 헝그리!!”

발악을 하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나 재미있는 볼거리었는지 크득크득 웃기만 할 뿐 누구 한사람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더더욱 발악을 하며 이미 부서져 있던 의자를 발로 찼다. 그리곤 어린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시비를 걸었고 한바탕 싸우려 하다 나이든 사람이 말리는 바람에 그냥 끝이나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도 그들은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엔 검문을 하던 커다란 덤프트럭을 잡아세웠고 그곳에 나를 태웠다. 경찰 차량도 아니었고, 경찰이 동행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모래를 실어나르던 빈 덤프트럭일 뿐이었다. 그 행동 또한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덜썩 거리는 덤프트럭 짐칸에서 맞이하는 거센 바람은 꽤나 슬픈 것이었다.

자헤단에 도착했다. 말끔하게 닦여진 도로와 사막지대 임에도 깔끔하고 빽빽하게 심어진 가로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도로위를 달리는 버스들은 너무나 고급스러워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덮어쓰고 있는 시꺼먼 차도르는 캐쥬얼한 복장의 남성들과 너무나 비교가 되어 수많은 의문에 휩싸이게 했다. 여행 안내서의 지도를 보고 숙소를 찾아나섰다. 

지나는 행인들에게 ‘바자르?’하며 방향을 캐물었고 그들은 대답대신 손으로 가리켰다. 어떤 이가 지나는 나의 뒤통수를 손으로 쳐(물론 나의 재빠른 반사신경으로 피했지만) 시비가 붙기도 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짜증나고, 실망하고, 허탈 한 그런 심정으로 마지막 골목으로 들어서는, 유턴이 허용되는 중앙차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엔 신호기가 없었으므로 ‘찬스’를 얻어 길을 건너야 했다. 차량이 뜸해진 틈을 타 얼른 길을 건넜다. 속도를 조금씩 내려 하는데 수상하다 싶었던, 뒤에오던 차량이 그만 나의 자전거 뒤를 들이박고 말았다.

쿵 소리와 함께 나른함을 느꼈다. 자전거에 가해진 충격으로 나는 안장을 벗어나 자동차 ‘본네트’위에 누웠다. 왜 자전거 여행을 선택했는지 크나큰 후회가 밀려오고, 또한 수많은 기억들, 추억들이 지나갔다. 죽을 때는 시간이 느릿하게 간다고 하던데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멀쩡했다. 신경을 통해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괜찮다고 얘길했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지만 선뜻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배낭여행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인가. 여행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인가. 몇시간으로 느껴진 1여분 동안 나의 여행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그냥 가려는 운전자가 보였다. 인도나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큰 사고가 아니면 그냥 가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그러는가 싶어 얼른 일어나서 얘길했다.

“폴리스~!!”
“!@#^$&*%$^%%^%&* 폴리스 ^%@#!%$@$%@^”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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