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꽁꽁 싸매야하고, 남자와 아이는 '그냥' 다닌다.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

여행자 숙소에는 나 이외에 그리스에서 온 사진가 아저씨 파울로와 네델란드 아저씨 데이비드가 있었다.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파키스탄에서 고생한 이야기부터 교통사고 나고 이후에 경찰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이야기까지 했다. 그랬더니 이 두분이 자기일 마냥 화를 냈다.

“아니 보상을 하나도 안해줬단 거야?”

“네, 교통사고는 제가 그냥 보상 안 받겠다고 한거고, 폭력사건은 그냥 무마된거에요.”

“나쁜 놈들, 썩을 놈들. 대사관에는 연락했어?”

“그곳에서 할 수는 없었어요. 도대체 여유를 안주는 거에요. 공중전화는 국제전화도 안되고. 전화가 되는 곳으로 가야했는데, 아무도 데려다 주지도 않고 저 혼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일 가려고 테헤란으로 온거에요”

“대사관에서 잘 처리해줄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나쁜놈들, 썩을놈들”

“고맙습니다.”

“하지만 김! 이란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있어. 나는 벌써 이란에서 몇 번을 초대받았다구.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들 가족들 사진도 많이 찍어줬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

파울로 아저씨는 입이 상당히 거칠었지만 따뜻한 마음씨가 우러나오는 분이었다. 자기일처럼 걱정해주시는게 여간 고마운게 아니었다. 또, 데이비드 아저씨 역시 아주 착한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들이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면 그날 밤은 정말 우울했을 것이다.

다음날 대사관을 찾았다. 불행하게도 담당인 영사님은 안계시고 행정관님만 계셨다. 그 분 말씀이 이란 정부도 똑같은 사람들이라 특별한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항의서를 넣을 수는 있지만 대답을 기다리려면 몇달이 걸릴지 모르는 문제라고 했다. 또, 그들이 때리지 않았다고 발뺌할 것이 뻔하다고… 내가 생각해봐도 그랬다. 내 몸에선 맞은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란은 독재국가이다. 종교 독재국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법률도 이슬람 율법에 따른 것이 많다. 이슬람 율법을 똑바로 지키며 나라를 이끌어 간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독재국가이다 보니까 권력을 쥔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다들 변형된 것 같았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여성과 남성의 차별. 여성은 머리를 가리는 ‘차도르’를 반드시 둘러야 한다. 

하지만 남성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청바지나 반팔 티셔츠 등등 멋을 부릴대로 부리고 다닌다. 파키스탄의 경우 남성들의 경우도 머리를 가리는 엎어놓은 밥그릇 모양의 모자를 대부분 쓰고다녔고 반팔티셔츠는 구경도 못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남성들만을 위해 법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 위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검정색 차도르를 두르고 다니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쓰러웠다.

도심에는 비밀경찰들이 많다고 했다. 그들의 임무가 많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종교법률을 어기는 사람을 잡는 것. 특히나 여성들의 복장상태가 잘못되면 바로 잡아간다고 했다. 차도르가 흘러내려 머리카락이 드러나거나, 바지를 조금 올려입어 발목 위까지 살이 드러난다거나. 그리고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며 대항을 한다면 잡혀가 죽는다고 했다. 

고문이라도 좀 하고 형식상으로나마 재판이라도 했던 우리나라의 독재시절을 생각하면 무섭기 그지없는 정부다. 학생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그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을 피해 학교로 도망갔다고 했다. 맨 윗층까지 오른, 궁지에 몰린 학생들. 경찰들은 그들을 잡아가지 않고, 건물밖으로 잡아 던졌다고 한다.

거리 곳곳엔 이미 고인이 된 ‘이맘 호메이니’의 사진이 붙어있다. 호메이니는 이란을 이슬람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시장경제체제와 여성해방에 노력하던 팔라비 정부에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물론 팔라비 정부도 수많은 비리가 있었을 것이다) 팔라비 정부를 실각시키고 자신이 정치, 종교 최고의 자리에 올라 이란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팔라비 정권에서 일하던 수백명의 사람을 공식처형 시키고, 이라크-이란 전쟁에서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후세인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2년이면 끝날 전쟁을 몇년을 더 끌었다고 한다.(자신이 이라크 망명시절에 후세인과 좋지않은 감정이 있었는지 후세인도 그를 타국으로 추방했다.) 또, 그가 펼친 경제계획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사진은 거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중국여행 당시 생각외로 마오쩌둥의 사진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특히나 이슬람교는 사원 내부에 조차 사진이나 신상을 두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가!

해결방법은 없었다. 그런 형편없는 독재국가의 정부를 상대로 뭔가를 하다간 외국인인 나조차 끌려가 숨통이 끊어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대사관에서 일종의 경위서를 작성했고, 영사님이 돌아오시면 이란정부에 항의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밥을 얻어먹고는 조금 아쉽긴 했지만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영사님을 만났다. 

영사님 말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처럼 미안해하시는 영사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사과를 하지 않았으니 자신이 대신하여 사과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 또, 밥을 사주시기까지 하셔서 배까지 든든해져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일이 업무라지만 이 정도까지의 친절은 기대하지 않았다. 행정관님 영사관님 모두 친절한 것으로 보아 재이란 한국대사관 전체 분위기가 좋은 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마음의 상처가 씻은 듯 나았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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