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로 상태가 많이 안좋아졌다. 자전거는 다행히 테헤란 시내에 있는 전문자전거 가게에서 고쳤다. 망가져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발견했을 땐 전신이 마비되는 듯 했다. 그것도 다행히 액정모니터만 망가진 것일 뿐이라서, 길 위의 아름다운 풍경사진들과 여행기는 멀쩡했다. 물론 430달러라는 돈을 지불하고 액정을 바꾸었다. 자전거와 노트북은 정상상태로 돌아왔지만 몸은 무엇인가가 멀쩡하지 않았다.
테헤란에서 이틀째 되는날은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서 눈물까지 났다.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피클이 문제가 되는 듯해서 그것을 빼고 몇일을 먹었더니 나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뭔가를 먹더라도 속의 더부룩함은 계속됐다. 소화도 안되는 것 같고 잠을 자도 피로도 풀리지 않는 듯 했다. 또, 무법질주하는 테헤란의 차량들은 제대로 걷도록 놔주지도 않았다. 걷는 것 조차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것들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주었다. 교통사고 이후 차만 봐도 겁이 났는데, 절대 멈추지 않는 테헤란의 차량들을 보자니 아예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자전거를 고치고자 택시를 타고 시내를 헤맸을 때, 그 택시는 사람을 앞에두고 급정거를 세번이나 했었고, 몇일동안 직접 목격한 교통사고만 3번이었으니.
자전거를 그만탈까도 생각했다. 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차가 무서우면 겁이나서 어떻게 달리겠는가. 그것도 교통지옥이라고 부를만한 이란에서. 그러다 힘들게 받은 이란비자하며, 지금까지 들었던 이란의 좋은 이미지들을 상상하며 다시 여행해보자고 다짐하곤, 아름다운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많다고 알려진 ‘쉬라즈’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 분위기는 정신이 없는 테헤란의 분위기와는 전혀 반대되는 조용한 곳이었다. 그러나 마주친 시민의 첫마디, ‘친니!!, 칭챙총!!’ 친니는 위에 설명한 것과 같고, ‘칭챙총’은 ‘친니’로 조롱이 조금 부족한 듯해 중국어의 발음을 자기식대로 흉내내어 덧붙이는 ‘중국인 공식 조롱 단어’이다.
대부분의 차량은 우리나라의 현대차나 기아, 일본의 미쯔비시나 도요타고.. 거의 모든 가전제품은 삼성, LG, 소니 이다. 그럼에도 ‘자판'(일본)이나 ‘꼬레'(우리나라)가 먼저나오지 않고 ‘친니’가 나오는 까닭은. 물론 거의 모든 공산품은 중국제다. 하여튼 공산품은 자국생산은 거의 없고 한중일에서 다 수입해서 쓰는 주제에 누굴 조롱하는지. 기름이 좀 나온 덕에 입에 조금 풀칠하는 사람들이!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것이라고 이해해야만 했다.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좀 더 넓은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불편한 심기는 누구에게 토로할까. 어려보이는 내 탓도 있었다. 몽골계열 인종에 비해 훨씬 늙어보이는 (실제로도 늙은) 그들의 눈에 고등학생정도도 안보였을 것이다. 머리가 길었던 인도, 파키스탄 시절에는 조롱의 대상이기 보다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머리를 자른 후에 그곳에서는 완벽한 조롱의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길을 지나던 어린아이들도 놀려댔으니까.
내부가 조그마한 거울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모스크나 수십개의 큰 기둥으로 바쳐진 거대한 모스크나 아름답긴 했지만, 불편한 심기로 맘편하게 구경할 수가 없었다. 또 그곳은 물건을 사려고 들른 수퍼에서도 물건가격을 형편없이 올려부르기가 일쑤였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않고 나가려면 물건을 내치는 일도 흔했다. 도대체 이란이란 나라를 칭찬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칭찬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땐 속이 더 안좋아져, 식당 앞에만 다가서면 구역질이 나왔다. 구토는 하지않았지만 곧 할 것 같은 기분이 많이 들었다. 소화도 잘 되지않아 밥을 먹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면 나아지겠지 생각하고 ‘에스파한’이라는 도시방면으로 출발했다. 오랫만에 탔던 탓인지 얼마 높지않은 오르막도 대단히 힘들게 느껴졌다. 보통 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만한 길. 내리막을 한참 내려간 후 속이 좋지않아 그늘에 잠시 멈춰섰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오고 결국엔 별스러운 구토를 했다.
20km를 달렸지만 다시 20km를 되돌아가 에스파한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병원을 가기 위함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간염증상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피로감, 구역질, 소화불량, 설사 등등. 찾아간 병원 의사는 그저 혈압을 확인하고 진찰을 해볼 뿐 별다른 검사는 하지않았다. 그리고 보통의 병원에서 그러하듯 몇개의 약을 받고는 돌아왔다. 3일간 그 약을 먹고, 같은 방에 있던 슬로베니아 여행자로부터 위에 좋다는 약도 받아 함께 먹었다. 하지만 증세는 더욱 심해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더이상의 여행은 힘든 것이라 판단했다. 테헤란이나 쉬라즈같은 도시와 다르게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한 에스파한이라 할지라도 구역질을 참아가며 밥을 해결하면서 여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터키의 이스탄불로 이동해 바로 귀국하기로 맘을 먹곤 테헤란행 버스를 탔다. 테헤란에는 이스탄불로 바로가는 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이란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장시간 버스였기에 간식을 사기위해 터미날 내 하나뿐인 가게에 들렀고, 그곳에서 두배가 넘는 가격을 불렀기 때문이다. 평소같으면 그런 가게에서 사지않으면 그만이었지만, 하나뿐이었고 꼭 사야만 하는 것이었다. 화가나 잔돈을 계속 요구했고, 잔돈도 다가 아니라 조금만 돌려줬기에 더 화가났다. 그는 안사려면 나가라는 식으로 물건을 빼앗고 돈을 돌려주었다. 그럴 순 없었다. 다시 내가 물건을 뺏고 돈을 주며 잔돈을 요구했다. 이란 마지막 날이었다.! 사실 그 직원은 조금전에 바뀐 것이었는데, 바뀌기 전의 직원은 정직하게 팔았었다. 똑같은 물건을!
갑자기 그는 소리를 치고 발악을 하면서 카운터에서 뛰쳐나왔다. 속으로 ‘역시!! 이란이야!!’ 하며 그를 맞이할 준비했다. 불행하게도 가게안에 있던 사람이 그를 막았고, 발악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퍼져나가 금방 많은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바람에 자크가 고장이 나 잠시 화가났지만, 발악하는 그 이란인이 이란을 마지막으로 대표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도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이란!! 이런!!
버스를 타고 이란을 빠져나오며, 이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나쁜 것들만 상상 했다. 그리고 수첩에 그 바람들을 일일이 적어가며 화를 삭혔다. 앞으로 어느 나라를 여행해도 이란보다 최악일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최악을 경험했으니 그 어떤 것을 경험하더라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어찌보면 이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짧은 20여일간의 ‘방황!’이 끝이났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