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이스탄불을 겨우 빠져나왔다. 골이 깊은 구릉지여서 오르고 내려가길 몇 번 반복하니, 또, 한달여만에 탄 자전거라 힘이 금방 빠져나갔다. 다행히 늦기전에 이스탄불을 빠져나갈 수 있는 도로를 찾아냈다. 해안에 접한 그 도로엔 심각한 바람이 불고 있어 간만에 길위로 들어선 나를 더욱더 힘들게 했다. 그래도 병에 지지 않고 다시 시작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기쁜마음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았다. 마음내키는대로 흘러가는게 자전거 여행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마음껏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유럽의 서쪽 끝인 리스보아까지!’ 라고 쉽게 결정되었다. 지금까지 서쪽으로 계속 왔으니 그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최초엔 캐나다까지 건너는 북반구 횡단이었지만, 여행을 하며 부족한 것을 너무 많이 알게되어, 배움에 효율을 기하기 위해 그곳에서 이번여행을 끝내고, 준비해서 다시 나오는 것이다.
이스탄불의 넓은 지역을 빠져나오니 너무나 평온한 농촌지역이었다. 구릉지는 끝나질 않아 언덕을 하나 넘으면 또 다음 또 다음 그런 식이었고, 그런 땅에 심어진 초록의 작물들은 다양한 빛깔을 내며 신비하고 푸르른 바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해변길을 가다가 ‘캠핑’이라고 적혀져 있는 곳에 들어가 야영을 하려고 했다.
시설이라고는 10평 안팎의 공간과 중국 시골의 화장실과도 견줄만한 더러운 화장실 그뿐이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10리라(7000원 가량) 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을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야지야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 이후로 처음하는 것이라 약간은 불안했지만 최소 40리라(28000원 정도)이상하는 여관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히 찰싹 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졌다. 아니, 근처에서 가게를 하는 아저씨가 먹으라고 구은 고기를 갖다주긴 했다. 몸상태는 전과 다르게 나아져 있었다. 가만히 누워 바다를 바라보았다. 부산 해운대 바다가 생각나서 잠시 울컥했지만,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에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앓았던 병은 정신적인 영향이 더 컸던 것 같았다. 굶기와 집단구타로 시작된 이란에서의 악몽이 육체적인 병으로 나타나 그간 괴롭혔다고 믿고싶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보름이상 앓던 병이 하루만에 그렇게 나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거센 바람을 거슬러 계속 구릉지를 주행했고, 저녁엔 보리밭 한 켠,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 큼지막한 나무아래 등에서 야영을 했다.
대형 마켓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식품들도 사먹었고, 길가에 등장한 패스트 푸드점에서 그리운 햄버거 맛을 맛보기도 했다. 그만한 자유는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자전거에 짐이 많다고 계속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구걸을 하는 사람도 없고, 20~30여명 모여들어 구경하지도 않고, 같이 자자고 하는 사람도, 무식하고 거세게 운전하는 사람,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도 없었다.
평온을 되찾았다. 가끔씩 구역질이 올라오긴 했지만 마음의 안정이 그것을 짓눌러버리는 느낌이었다. 어느날 아침엔 그리스 국경이 나타나 오랜만에 새로운 국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