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덕들이 그곳에 살아가고 있었다. 올라가는듯 하다가 내려가고, 내려가는듯 하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동그랗게 말린 건초더미가 널린, 걷이가 끝난 밀밭은 갈색 파도를 연상케 했다. 종종 해바라기 밭도 만났는데 너무나 강한 노란빛은 푸른하늘조차 물들이는 것 같았다.
이틀을 달려, 유럽에서 넘어오던 여행자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시에나’에 도착했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중심지는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위치했다. 또, 거대한 성벽이 ‘올드시티’를 감싸고 있었는데 야영장을 먼저 찾기 위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그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신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가 미웠지만 꼭 가보라는 그들의 말들이 귓바퀴 주변을 맴돌았기에 얼른 짐들을 팽개쳐놓고 둘러보고 싶어 참았다. 도중에 야영장 이정표가 끊기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이정표가 나의 혼을 빼놓는 듯 하더니 겨우겨우 물어물어 도시 외곽 구석에 쳐박힌 야영장을 찾아냈다.
철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닫혀있었기에 그곳이 아닌줄 알았다. 한참을 달리다 뒤돌아 나올 때 그곳이 내가 찾던 야영장임을 알았다. 철문에는 각종 쪽지가 붙어있었다. ‘나 누군데 여기서 몇키로 떨어진 야영장에 있어’, ‘이 곳이 문을 닫았으니 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 전화해’ 등등 모두들 이곳이 영업하는 줄 알고 서로 약속했다가 도로(徒勞)가 된 상황이었다. 물론 나역시. 내부도 깨끗하여 문을 닫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바로 전날 노숙을 했고, 그 덕택에 몸은 완전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 상당’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기에 야영장에서 좀 쉬고싶었다. 다른 모텔이나 호텔같은 경우는 최소가 40~50유로(5만원~7만원)가량이었기에 나 따위가 묵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앙코나에서 얻어온 ‘이탈리아 유스호스텔 안내지도’에 희망을 걸었다.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천만다행이게도 그곳에 유스호스텔이 존재했다.
주소가 나와있었지만 시에나 지도가 없었기에 우선 지도를 구해야 했다. 그를 위해 중심가에 위치한 서점을 찾았다. 조그맣고 품질도 바닥을 치는 조그마한 도시지도가 5유로(6500원)라는 어처구니 없는 가격을 제시했다. ‘관광정보센터’같은 곳이 문을 열었다면 그런곳에서 쉽게 지도를 구할 수 있을테지만 그 시간은 이미 문을 닫은 때였다. 몇일간 그곳에 묵으며 초 유명한 시에나를 구경할 요량으로 맴맴하며 고추먹기로 그 지도를 구입하고 말았다.
지도를 손에 들고도 못찾아 가는건 나의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진 탓이리라. 한참을 헤맸다. 두어시간이 흐른 후 주소지를 찾긴했는데 도무지 길 양 옆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노숙을 해버릴까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거지 상당’인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념했다. 그 길 끝에 위치한 ‘맥도리아’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때까지 거의 ‘시골’수준인 곳만 다니다 복잡한 도시로 들어오니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비참했다. 평소에는 길찾기의 도사라고 자부하고 다녔기 때문에 더 그렇다. 사실 그 도시의 유스호스텔이 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힘도 없고, 의욕도 없고, 기대감도 사라져 갔다. 식당을 빠져나와 천천히 걸어갔다. 한집 한집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유스호스텔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 동양인 여자 둘을 만났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평범한 중국인인가 아니면 여행자인가 파닥파닥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엑스큐즈미”
하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대뜸 우리말로,
“유스호스텔 찾으세요?”
라는게 아닌가! ‘아니 어떻게 그 비밀을…그것도 우리말로…’ 속으로 놀랬으나 나의 땟국물 티셔츠에 조그맣게 한글이 적혀져 있었다고 손짓으로 알려줬다. 그들이 알려준 유스호스텔은 그 자리에서 불과 20여미터 떨어진 곳에 존재했다. 보통의 유스호스텔은 파란색 삼각형에 집과 나무가 그려진 마크를 크게 걸어놓는데 그곳은 조그마하게 붙여놓아 내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15유로라는 다소 비싼 요금이었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짐을 풀고 있는 와중에 그들이 돌아와 말을 걸었다.
언제 들어왔느냐, 얼마나 여행했느냐, 바로 전 나라가 어디냐 등등 주고받고를 하다가 나에게 중요한 한마디를 던졌다.
“너구리 드실래요?”
눈은 똥그래지고 머리 끝 정수리에서부터 발끝 엄지발톱까지 모든 미세혈류마저도 가슴으로 모여 심장을 뭉뚱그리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있어도 숨이 멎을 것 같아 빠르게 대답했다.
“네”
그들은 자동차 여행중이었다. 자동차를 2개월간 리스하여 2개월은 서유럽을 여행하고 나머지 한달은 자동차 없이 동쪽의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한다고 했다. 그 때는 여성동지 두명이었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다른 남성여행자 둘과 여행을 함께했단다. 둘은 모두 어려보였지만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들이었다. 이름은 윤정누나와 송희누나.
‘너구리’도 먹고 생후 한번인가 먹어봤을만한 지역산(이탈리아) 와인도 맛보았다. 즐거운 이야기 나무가 무럭무럭 자랄 무렵 안주로 ‘원조햄’을 꺼냈다. 그 햄은 평소 길을 지날 때 대형전광판의 광고를 통해서, 슈퍼마켓 햄 코너에서 자주 보던 햄이었다. 돼지 뒷다리 부분을 통째로 가공하고 숙성시켜 겉에는 하얀 곰팡이 같은 것이 폭넓게 피어난 것이 약간은 거부감을 일으키던 것이었다.
“이 햄 맛있는 거에요. 되게 고급이래요~. 한국에선 구하기도 힘든거죠.”
“이거 길가 간판에서 많이 봤던거에요. 이게 햄이었어요? 먹는거에요? 저는 썩은 걸 왜 광고하나 싶었어요.”
“하하~~”
그것을 후라이팬에서 약간 데워 먹었다. 한조각을 먹었는데 그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내가 그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번에 입과 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괜찮은데 저한테는 안맞아요”
의아스럽게도 다른 나라에서는 더 그렇겠지만, 유럽안에서도 그런 햄은 상당히 고급으로 분류되는 햄이었다. 당연 가격도 보통의 햄보다는 훨씬 비싼편.
의례 여행자를 만나면 그렇게 했듯이 여행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유럽에 들어온 이후 혼자서 대단히 심심한 편이었는데 그들과 만나면서 심심한 것은 대부분 사라져 갔다. 바람도 쐴 겸 시에나는 밤에 나가야 한다는 얘기에 ‘캄포광장’으로 나가자고 했다. 자동차도 있었기에 밤늦은 9시경이었지만 OK 했다. 사실 그 분들은 여자만 둘이라 밤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가 내가 있으니 ‘옳거니!’했던 것이다.
거대한 성벽을 뚫고 도로는 이어져 있었다. 주차를 할만한 공간에 주차를 한 후 광장까지 걸어갔다. ‘아시시’와 마찬가지로 완전 중세도시였다. 간간이 나타나는 가로등이 더욱 더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큰길로부터 유입되는 수많은 인파들에 휩싸였다. 밤 9시면 보통의 도시라면 쥐죽은 듯 조용한 시간일테지만 그곳만은 예외였다. 길가의 상점들도 거의가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인파는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도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
길의 끝이 나왔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 사람들도 그 끝으로 난 구멍 아래로 흘러갔다. 두 누나는 갑자기 멈춰섰다.
“성만씨, 먼저 가보세요. 저쪽 아래로. 우리들은 어제 와봤어요.”
혹시 뒤에서 미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을 등에다 메고 계단을 한 개씩 내려갔다.
첫 번째 단을 내려섰을 때는 네모난 돌로 포장된 바닥이 보였다. 두 번째 단을 내려섰을 때는 그 바닥이 넓어지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세네번째 단을 내려서다 확트여지는 시야가 놀라워 얼른 뛰어내려갔다. 4~5층씩 되는 벽돌식 중세건물들이 조개껍질을 뒤집어 놓은 듯한 아주 넓은 광장을 둘러쌓고 있었으며 그 끝에는 높은 탑이 돋보이는 ‘시민궁전’이 있었다.
둥그렇고 비스듬한 그 광장에는 수많은 주당들로 빽빽했고, 그 외곽도 역시 수많은 주당들이 있었다. 수백년전에 건축된 이곳의 광장과 건물들을 아직도 애용하며 그곳에서 즐기는 사람들이 놀라웠다. ‘중세유적 대개방, 오늘만 유효, 유적지에서 친구들, 연인과 함께 즐겨보세요’ 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광장에서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모든 건물의 건축연대가 수백년씩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개보수하여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영업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법적으로 외관을 훼손치 못하게 했는지 그 흔한 간판조차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상태 그대로 놔두고 내가 무명으로 만든 우리옷을 입고 조그마한 갓만 눌러쓴다면 영락없는 ‘시에나의 개성상인’이었다. (아니 부산상인이겠지)
한쪽 골목에선 포도주 통 굴리기 대회도 하고 있었고, 궁전 앞에서는 무대를 설치해놓고 한창 노래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도 많았고, 관광객들도 많았다. 그 날은 날짜로는 그저 평범한 날임이 분명했지만 그곳의 나에게는 대단한 축제의 분위기였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