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말에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이 올거라고 이야길 해주었다. 구급차도 온다는 얘길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등 뒤에 선 사람들이 자꾸만 웃길래 인상을 쓰며 뒤로돌아보니, 그제서야 엉덩이가 완전히 보일만큼 바지가 찢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반바지를 꺼내려 허리를 숙인 순간 사람들의 환호성! (자전거 탈때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정말이지 빨리 경찰이 도착했다. 그들에게 영어로 나의 상황을 설명해보았지만 듣던대로 그들 중 영어를 할줄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사고설명은 당연히 운전자가 유리한대로 흘러갔다.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이곳은 이란이니 어쩔 수 없는 일. 내가 하는 일은 그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는 것 뿐. 자전거와 짐들을 가해자 차량에 싣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자전거를 고치는 수리점이었다. 그곳에서 자전거를 대충 고치고는 보내자는 심산이었던 같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 수첩을 꺼내고 바퀴를 가리키며 ‘200USD'(200미국달러)라고 적었다. 실제로도 그 자전거의 바퀴는 그 정도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몇푼이라도 보상을 받아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보통 그들이 즐겨타는 자전거가 20~30 USD 정도 하니까 놀랄 수밖에. 가해자와 나는 교통경찰의 안내를 받아 경찰서로 향했다. 우리나라 시골 초등학교 규모의 중급 경찰서였다. 고급 경찰차도 많았고, 경찰들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서 작성 역시나 그 사람의 말만 들을 뿐 나에게서는 여권만을 잠시 확인할 뿐 아무런 배려도 없었다. 조서작성이 끝나고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사실, 기다리라는 말이나, 상황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설명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있어야 했다.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났다. 경찰서로 잡혀오는 사람이나 볼일을 보는사람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경찰이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사람들이 나를 구경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미스터! 친니?”
“나~나~!! 꼬레~!” (나나 = 아니아니)
이곳에서는 외국인을 보면 무조건 ‘미스터’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몽고계열 인종만 보면 거의 ‘친니?’ 라고 묻는다. ‘친’은 진秦나라(중국)를 뜻하고 ‘니’는 우리나라의 ‘인’처럼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중국인?’이라고 묻는 것인데, 그 물음속에 대부분 조롱이 섞여있다. 그렇잖아도 배고프고, 교통사고나고, 수시간 째 계속되는 기다림에 미칠지경인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의 상황을 모른다손 치더라도 좀 너무한다 싶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배고픔을 참기 힘들었다. 전날 파키스탄 사막을 트럭타고 올 때도 먹은 거라곤 몇 개의 난(화덕에 구운 빵의 일종)밖에 없었다.
(배를 만지며)“배가 고파서”(손을 입으로 갖다대며)“밥을 먹어야 겠으니”(밖으로 손짓하며)“나갔다와도”(엄지와 검지를 모아 ok를 만들어서)“되겠어요?”
아저씨는 바로 이해를 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나~, %$@^#&%*^^(&%@^#$!@#%!$^#*&$#$@^%#”
라고 얘기했다. 대충 이해하기론 경찰이 가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한다는 것.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떤식으로 하는 것이길래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에 미칠지경이었다. 결국, 우리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꺼냈다. 나에게 경찰서에서 잘 것인지 물었다. 죄인도 아니고해서 호텔로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가해자’는 어느새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나만 남겨진 상태였다. 나를 데려갈 사람에게 호텔로 언제가냐고 이따금씩 물었다. 역시나 기다리라는 말과 짜증스러운 표정. 그러고도 한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더 이상 참는 것은 곧 기절로 이어질 것 같아 주변에 모인 경찰들에게 얘기했다.
(배를 만지며)“나 배고프니까”(손을 입으로 갖다대며)“뭣좀 먹으러”(바깥을 가리키며)“나갔다 올게”
그리고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
라고 외치며 나를 불렀지만 짜증이 우주만방에 펼쳐진 상태였던지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더욱, 죄인도 아니고 이미 가해자는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경찰서 밖으로 50여미터 걸어갔을까. 경찰 하나가 뛰어와서 나의 팔을 잡아채어 데려가려고 했다. 슈퍼마켓이 20여미터 앞에 있었으므로 그곳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당연히 뿌리쳤고 그 상황이 몇번 되풀이 됐다. 그러는 중에 3명의 경찰이 더 뛰어와서 앞 뒤 잴 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때렸다. 집단폭행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군인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이란도 남성이라면 군에서 2년정도 의무복무를 해야한다. 그런 의무복무중인 어린 군인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주먹과 발놀림은 5년 가까이 군 복무를 마친 나에게는 어린애 장난같은 것이었다. 4명이라도 9000km의 자전거 여행으로 다져진 다리와 특공무술 2단이라는 배경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그 자리엔 총을가진 놈도 있었고, 그것으로 상황이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나 역시 너무나 흥분한 상태였던지라 맘을 잘못먹는다면 그들 중의 한두명의 목을 꺾어 숨통을 끊어지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여행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와닿았다. 때마침 나이든 경찰이 뛰어와서 말렸다. 팔짱을 끼고 경찰서로 돌아갔다. 그 사이를 못참고 그 어린 군인은 나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치고 엉덩이를 발로 찼다. 황당해서 옆의 경찰에게 이거 무슨일이냐는 식으로 눈빛을 보냈더니 도리어 니놈이 못된놈이야 하는 매서운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너무나 화가났다. 맞은 것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억울했다. 말이나 되는 것인가!! 이런 상황이!!
팔짱을 뿌리치고 경찰서로 뛰어들어가 계급이 높아보이는 사람의 멱살을 잡아챘다.
“유~! 보스!??!??”
라고 소리쳤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또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아채곤 다시,
“유~~!! 보~~스~~??!!”
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곳에 ‘보스’는 없었다. 완전히 마음이 상해 지금까지 이란에 대해서 좋게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이란비자를 내어주던 영사관에게 이란 너무 좋은 것 같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서울에 테헤란로가 있어서 이란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했다고 얘기했는데…
불과 10여분 뒤에 호텔로 갔다. 시계는 밤 1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분통에 막혀 잘 넘어가지 않던 밥을 겨우 넘기는데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바로 대사관에 전화하고 싶었지만 전화번호는 경찰서에 놔둔 가방에 있었다. 또, 영사 콜센터에 전화하려고 생각했지만 너무 늦은시간이라 다음날 할 수밖에 없었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