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버스이동 중, 잠깐 내린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 비현실적 풍경.
보스포루스 해협 고급 주택들.
보스포루스 해협에 앉은 사람들. 머리를 가린 '천'이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잇는 다리
이스탄불의 보통 집들. 붉은 기와와 미사일같은 종교탑이 눈에 띤다.

테헤란에서 낮에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새벽 5시경 터키 국경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짐을 모두 내리고 개별적으로 국경을 통과한 다음, 검색을 마친 버스에 다시 올라타야만 했다. 하지만 앞서 도착한 몇 대의 버스가 다 통과하기까지 몇시간을 기다려야했다. 터키쪽에는 한라산과 비슷한 모양의 거대한 아라라트 산이 솟아나 있어 해외여행 가는 많은 승객들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 산은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산으로 알려져 있어 여러민족들에게 신성시되고 있는 산이었지만 불안, 초조, 긴장, 피곤한 나의 마음을 달래지는 못했다. 아침 9시가 다되어 모든 수속이 끝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란을 넘어오는 동안 이란에 대한 악한 감정만 쌓은 탓이었는지 국경을 넘자마자 포근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렇게 또 이틀을 달렸다. 도중에 식사를 위한 휴게소에서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비싼 물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란까지는 비싸도 이삼천원 안쪽이면 웬만한 식사는 다 해결이 됐는데 여긴 만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음료수나 빵 같은 기본적인 것도 비싸긴 마찬가지였다. 여행을 준비할 때, 터키는 유럽지역에서 싼 지역이니 서유럽에서 배고팠던 것을 터키에서 해결한다고 들었기에 ‘날 속이는 것은 아닌가!’하고 유심히 보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터키풍경은 이란과 인접해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달랐다. 오순도순 모여있는 빨간지붕들의 집들과 그 사이에 꼭 하나씩 비집고 들어가 있는 조그마한 모스크. 모스크는 특이한 모양의 기둥 때문에 특별히 눈에 띄었는데, 그게 내가 평소 상상하는 ‘미사일’ 모양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황량한 사막이었던 이란과 달리 식생 또한 달랐다. 숲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지만 초록색의 키작은 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스텝지역이었다. 물론 마을지역은 사람들이 심은 듯한 나무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팠던 몸은 조금 나아지는 듯 했지만 여전했다. 조금은 달라진 음식이라지만 먹기가 버거웠다.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기 일쑤였다. 죽을 병에라도 걸린 듯한 표정으로 나날을 보냈지만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렇게 비싼물가의 터키에서라면 나의 병을 충분히 진단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다소 열악했던 이란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만약 간염이 아니라면 약을 먹고도 충분히 나을 수 있을거야’
‘이렇게 끝내기엔 너무 아쉽잖아?’

라는 생각의 결론에, 터키 의사의 소견에 따르기로 했다. 또, 터키의 한국식당에서 한국음식으로 몇일간 요기를 한다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간염이라면 한국행, 아니라면 여행 계속!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드디어 이스탄불 외곽에 도착했다. 바다가 맨 먼저 보였고, 도로는 바다를 끼고 이스탄불로 향했다. 공장들이 많은 공업지대도 지나고, 빨간 집들로 수백채, 수천채가 찬 도시도 지났다. 그리곤 이스탄불에 들어왔다는 이정표를 지나쳤다. 시골마을의 오순도순 모여있는 모습만 보다가 도심의 모습을 보니 다소 답답하긴 했지만, 골깊은 구릉성지형을 이루는 그곳에 가득찬 빨간 집들은 푸른바다와 빨간바다가 양립하는 듯 기막힌 도시풍경을 만들어 냈다. 

넘실거리는 빨간바다를 구경하다 어느새 크고 긴 다리를 건넜다. ‘아!!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가 된다는 보스포루스 다리’. 아프지 않고, 이란에서 나쁜일만 겪지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은 이곳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저 다리위에서 아시아 횡단을 끝마친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 했었는데…’ 그야말로 크나큰 아쉬움이 밀려왔다.

유럽이었다. 거리에 천막을 드리운 곳에 예쁜 탁자와 의자를 두고 장사하는 식당과 찻집들. 노랑머리와 파란눈의 사람들. 민소매 상의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다니는 여성들. 매체의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아왔던 유럽의 풍경이었다. 너무나 깔끔한 길거리가 풍만이(자전거)의 주행을 부담스럽게 했다.

눈에 띄자마자 들어간 한국식당! 그 동안 구역질을 참아가며 음식을 먹느라 힘들었지만, 그곳에서는 역시나 구역질 같은 것은 커녕 군침이 돌았다. 그러나 김치찌개가 10달러에 달해 한국음식으로 요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었다.

다음날 숙소의 지배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좋은 병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는 한참 설명했지만, 안되겠는지 함께 가자고 얘기했다. 나보다 훨씬 늙어보였던 그는 나와 동갑이고 지금은 학교선생일과 숙소 지배인역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한국식당 주인아저씨는 보건소가 싸기 때문에 보건소로 가라고 했었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보건소는 책임이 없다고 개인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도착한 병원, 의사가 10명은 넘어보이는 중소규모의 종합병원이었다. 시설은 새 건물이고 아니고를 떠나 고급스러움이 두텁게 묻어났다. 손님도 별로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왠지 부담스러움이 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찰가격만 3만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보험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았다. 

나의 증상을 듣고, 청진기로 이리저리 대보고 배도 움켜쥐어 보고 했다. 그리고 지배인을 통해서 의사에게 간염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종이에다 여러 가지를 적었고 그것은 모두 내가 받아야 할 검사들이었다. 심지어 에이즈 검사까지 포함되어있었기에 계산대에 가서는 검사비용을 알아보았다. 우리돈 13만원정도나 되는 돈이었다. 월권인줄은 알지만, 간염검사만 받겠다고 얘기하고 3만원정도만 지불했다. 의료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 비싼 요금이었다. 검사야 그렇다치고, 진찰료만 3만원정도면… 터키 물가도 그렇고 병원비도 이상해서 그에게 물었다.

“터키인 보통 월급이 얼마나 되죠?”
“제가 고등학교 선생인데 월 800달러 정도 되요.”
“그렇담 그건 많은건가요? 적은건가요?”
“공무원 월급은 조금 많은 편이지만 일반직장인은 그것보다 적어요”
“그런데 진료받고 검사받는데 이렇게 비싼거에요?”
“아마 보험이 없어서 그럴거에요. 보험이 있다면 조금 더 싸요”

그러나 보통의 슈퍼물가도 우리나라 물가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터키국민들이 다소 고생하는 듯 느껴졌다.
다음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검사실에서 검사결과를 받아 의사에게로 갔다.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았다. 돋보기안경을 썼다 벗었다하며 다른 검사는 받지않았냐고 물었다. 살짝 애교섞인 미소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얘길했다. 하지만 그는 큰 나무람 없이 처방전을 써주었다. 아무말도 없자 내가 궁금하여 물었다.

“간염 아니에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리얼리?”(진짜로?)

기쁜 마음으로 약국을 찾았다. 처방전을 주고 약을 받는데, 한 봉투 가득 약을 담아줬다. 우리나라처럼 필요한 만큼만 싸서 주는 것이 아니라 20~30알씩 포장된 약통을 통째로 몇 개를 준 것이었다. 돈도 3만원을 넘게 지불했다. 다소 황당했지만 그것을 먹으면 낫는다는 얘기였던지라 기꺼이 지불했다.

오랜방황이었다. 이란에서부터 몇일동안이나 제대로 먹지못하고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던가. 매 순간, 바로 곁에 공항이라도 있었다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약을 받아 돌아가던 순간에도 몸은 썩 좋지않았지만, 간염이 아니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다시 시작이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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