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박집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과 공항으로 향했다. 자전거가 들어간 커다란 상자와 여러개에 담긴 짐들을 한군데로 몰아넣은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겨우 갈아타며 공항행 지하철에 올랐다. 어찌나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가던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금방 공항에 도착해 버렸다.
항공권을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결재한 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약간 불안했지만 항공사 사무실에 여권만 들이미니까 항공권을 쥐어주어 출국절차를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다만 가지고 있던 짐이 문제를 일으켰다. 자전거와 기타 물품의 무게를 재어보니 무거운 것들만 집어넣은 등가방을 제외하고도 40kg이 넘어 기본 22kg 무료에 8kg 서비스를 받고도 초과중이 10kg이나 됐다는 것. 그리고 가격을 물어보니 1kg 당 무려 65유로라고 했다.
그러니까 10kg 650유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850000원에 육박하는 것이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나의 항공료가 900달러에 못미쳤으니 내 몸과 나의 짐이 같은 요금인 것이다. 70kg인 나와 40kg인 짐이 같은 요금이란게 상당히 못마땅했다. 리스본에서 떠나기 전, 텐트와 코펠을 버리고, 기타 등등 무게가 나갈 것 같은 것들은 다 버렸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전거 바퀴와 안장, 체인같은 소모품을 버렸고 가방안의 책과 침낭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무게를 다시 재니 자전거 포장박스에서만 8kg이 감량이 되어 짐은 통과됐다. 아니, 가방 안에 물건들도 버렸는데 그건 어쩌구!! 쓰레기를 버린 휴지통에 눈길을 줘 봤지만 내 물건들은 이미 치워진 상태였다. 짐들이 커 아저씨보고 내가 치워달라고 했기 때문에.
이륙한 비행기는 쏜살같이 저녁으로 향했다. 대낮에 비행기를 탔음에도 운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해는 져버리고 말았다. ‘동쪽으로 날아간 탓이겠지. 그렇다면 서쪽으로 날면 해가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지나왔던 터키와 뼈아픈 기억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이란 하늘을 통과했다. 액정화면에는 낯익은 지명들이 적혀져 있었다. ‘타브리즈, 테헤란, 에스파한, 쉬라즈‘ 등등. 교통사고만 없었다면 여행중 최고의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 이란. 끝없이 펼쳐진 소금사막과 친절한 시골사람들. 그러나 내 인연이 거기에 닿지 못했던 것이다. 차가운 창에 볼을 바짝 대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드문드문 아득한 노란불빛들이 밝혀져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연결편을 타기 위해 도착한 두바이 국제공항. 수많은 승객들이 같은 목적으로 공항에 대기하고 있었다. 면세점이나 휴게실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 이외에 타항공사 운항이 많은 것 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바이의 떠오르는 위력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연결편은 새벽 늦게 출발했다. 노트북에 받아온 영화를 다 보니 지루한 시간도 금방이었다. 때로는 고통속에서, 때로는 즐거움 속에서 허덕이던 나날들. 정말 끝인 것이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여행이지 않은가. 무대위에서의 연극일 수도 있고,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화일 수도 있다. 영화나 연극은 연출가와 수많은 스텝과 배우들이 만든다. 여행은 누가 만드는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인생자체를 여행과 같이 생각한다면,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슬기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슬픈 영화는 슬프게 만드니까 그런 것이고, 재미있는 연극은 재미있게 만드니까 그런 것이다.
몇시간 지날 것도 없이 금새 떠오른 태양은 황량한 대륙을 조망했다. 황색의 메마른 땅 위에는 생물의 핏줄처럼 과거의 물의 흔적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도시도 나왔지만 그 광활한 대륙은 황색 일색이었다. 그러는 것도 잠시 중국의 ‘청도’시 상공을 가로지른 후에는 황색의 바다가 나왔다. LCD 모니터에 비행궤적은 천천히 이어질 뿐이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심장은 더욱더 빠르게 뛰었다.
기장의 인천 도착메세지가 흐른 후, 창 밖으로 암녹색의 숲으로 덮힌 섬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더니 비행기는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한국식 집들이 어찌나 미소짓게 하던지,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여행 때 사라진 부끄러움이 다시금 몸안에 들어온 듯 망설여졌다. 하늘을 날던 거대하고 무거운 새가 넓고 긴 도로위에 안착했을 때의 기분이란! 무의식적으로 박수가 나오고 말았다. 덩달아 치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주변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떤 무식한 것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볼이 넓고 코가 낮은 한국인들이 공항 내를 누비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간식을 사기위해 들른 편의점에서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들른 패스트 푸드점에서나 모두 알아듣기 쉬운 한국어로 이야기 했다. 가슴이 벅차올라 마주치는 이 모두에게 먼 길 여행에서 지금 막 돌아왔노라고 떠들고 싶었다.
몇시간을 기다린 후에 드디어 고향 부산으로 가는 항공기를 타게되었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한 탓에 비행기가 택시웨이를 돌고 활주로 끝에서 속도를 내 이룩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비행기는 어둠속을 날아 한시간여만에 그토록 바라던 부산땅이 내려다 보이는 하늘에 들어섰다. 고향이 그릴 때면 항상 불렀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눈에서는 참아왔던 그리움이 눈물로써 흘러내렸다.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이, 행복의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처음 중국에서 산을 넘던 일, 티베트에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땅에서 페달을 밟던 일, 5200m나 되는 고개에서 별을 보겠다고 자다가 죽네 사네 밤새 앓았던 일, 너무나 아름다운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산행했던 일, 트럭아저씨에게 성추행 당하며 꼴까따까지 끌려갈 뻔한 일, 인공의 아름다움이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증명해 준 타지마할, 배낭여행 3대 블랙홀이라고 불릴 정도의 웅장한 계곡을 뽐내는 파키스탄의 훈자마을, 섭씨 52도의 고온 속에서 겪어봐야 이겨낸다며 쉼없이 주행했던 일, 검은 산을 헤치며 겨우겨우 나아가다 총을 든 사내를 만나 결국 히치로 빠져나왔던 파키스탄 서부 사막지대,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겹겹 줄줄 악재가 겹쳐졌던 이란의 악몽들, 간염이라고 앓던 놈이 병원의 아니라는 판단에 금새 건강해져 여행을 다시시작했던 일, 병이 다 나을 무렵 그리스의 산에서 무지개를 보고 이것은 신의 축복이라며 소리지르던 일, 금방 철갑옷을 입은 용사가 나타나 길을 막아설 것만 같은 중세시대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만난 너무나 감탄스런 인연, 세계적인 영화의 도시 깐느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고속으로 빠져나갔던 일, 자신의 나체에 대해서 너무나 떳떳한 프랑스 사람들, 프랑스 남부 까마그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어 미아가 되는게 아닐까 당황했던 일, 높은 산이었지만 너무나 밋밋했던 피레네의 피그말 봉, 도시는 이 정도는 되야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최고의 도시 바르셀로나, 자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최고의 예술을 보여주었던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몇일동안이나 계속 하늘에 수놓인 별을 볼 수 있었던 스페인 중북부 고원지대, 한번에 구멍이 10개가 넘게 나버린 타이어 튜브를 떼우느라 결국엔 밤을 세우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일까지.
죽는 것도 아닌데, 수많은 순간들이 샥샥 스쳐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눈물의 양은 많아졌고, 결국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일그러진 표정과 눈물, 소리를 막기 위해 얼굴은 창문에 바짝대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행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돌아 도착지점으로 갔고, 나의 눈물도 멈추었다. 공항에 마중나온 친구를 덥썩 끌어안으며 나의 또다른 여행은 시작되었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