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발효돈사, 우리가 짓고 있는 축사의 방식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리기는 했어도 친환경 양돈을 추구하는 곳에서 다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인데, 특히 ‘땅 파기’를 할 수 있다. 개는 냄새를 맡아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돼지는 땅을 파야 된다. 논밭에 먹이를 찾으러 온 맷돼지들은 고라니들처럼 열매만 먹지 않고 꼭 땅을 다 뒤집어놓고 간다. 땅 속의 열매는 물론 곤충들까지 먹는다. 

땅 속에 자기들의 먹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수 만년을 땅 파며 살아왔으니 땅을 팔 수 있도록 해주는 건 중요한 요소다. 쉴 자리도 잠 잘 자리도 땅을 파내어 그곳에 눕는다. 사람 코는 살짝만 쳐도 눈물이 핑 도는데, 어떻게 코로 땅을 파나 신기했다. 한 번은 돼지 콧등을 누르듯이 만져보았더니 사람같은 물렁뼈가 아니라 아주 크고 단단했다. 코로 땅을 파는 습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돼지들에게 최소한의 본능을 해결해 주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1980년대에 일본에서 도입한 톱밥발효돈사는 사실 돼지들이 땅을 파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분뇨처리가 중요한 이유였다. 일반적인 돈사는 분뇨를 매일 치워주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한다. 그렇게 해도 축사 안은 분뇨에서 발생한 유독가스 때문에 돼지들의 건강은 물론, 주변의 마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톱밥발효돈사는 똥을 자주 치워주지 않아도 되고, 톱밥과 섞여 호기성 발효를 통해 악취가 나지 않는 양질의 퇴비가 된다.

1992년에 정부에서는 표준설계도를 제작해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톱밥가격이 워낙 고가인데다 함께 섞어서 넣는 발효촉진제 역시 고가였다. 발효제를 판매하는 업체에서는 매일 똥을 치워주지 않아도 된다고 홍보했으나 발효가 다 된 똥을 뒤집고 축사 밖으로 꺼내는 일이 더 고된 일이었다. 정부는 소규모 농가에서 톱밥발효돈사를 설치하게 되면 별도의 분뇨처리시설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도 빠르게 사라졌다. 몇 해 전까지 소규모 농가들은 허가를 받지 않고 운영했기에 법적조건은 필요없었다.

톱밥 차가 톱밥을 붓고 있다.

우리농장도 톱밥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톱밥이 비싼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고, 비싼 것은 둘째치고 구하기도 힘들었다. 200평이 조금 모자라는 축사에 채워야 할 톱밥을 계산해보니 법적기준 45cm는 265루베이고, 농장 목표치 60cm는 355루베였다. 부피로만 계산하면 15톤 덤프트럭 기준 26대에서 36대 분량이다. 한 대당 10루베 내외가 실리기 때문이다.  길이 좁아 더 큰 트럭이 들어오지도 못한다. 

처음 생각으론 경북이 한우가 유명하고, 우사에는 톱밥을 많이 쓰니까 톱밥을 구하기가 쉬울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많이 구입하면 환영받을거라 예상했던 업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사에 톱밥을 쓰긴 써도 바닥에 살짝 깔아주는 정도이기 때문에 재고량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포털 지도 서비스에서 ‘톱밥’으로 검색한 다음 ‘로드뷰’로 규모를 확인해가며 전화를 돌렸다. 황당하지만 최선의 방법이었다. 보통은 제제소의 부산물로 판매하는 곳이 많은데, 구미에서 톱밥만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를 찾았다.

톱밥을 공급해줄 수 있는 업체를 만나 안심을 한 건 순간이었다. 7~8톤 정도 싣는 톱밥 차가 하루에 한두 대씩만 들어오고, 축사 앞은 부지가 작아 딱 두 대 분량의 톱밥만 쌓을 수 있었다. 도착하는 대로 치우지 않으면 다음번 톱밥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주일 내내 굴착기와 덤프 등 장비를 불러서 치우면 좋으련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삽질을 선택했다. 약 80톤의 톱밥삽질.

사람들에게 자랑처럼 ‘우린 톱밥을 채워서 돼지를 키울거에요’라고 했던 말이 가볍게 느껴졌다. 톱밥차가 쏟아 부은 양을 보고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생각한 건 첫 번째로 도착한 톱밥을 치웠을 때, 딱 그때 뿐이었다. 한 번에 두 대가 들어온 날은 아침부터 치우기 시작해도 밤 10시 너머까지 삽질이 이어졌다. 가슴 속에 성취감 따위가 들어갈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날마다 ‘산’을 치워도 또 ‘산’이 생겨났다. 

하루는 삽질을 하던 도중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근육통이나 관절통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아픔이었다. ‘한 시간만 더 하면 될거야’하던 게 ‘이대로 쓰러졌다간 얼겠다’로 금방 바뀌었다.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체온이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살짝 비틀비틀 거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삽을 던져놓고 집으로 향했다. 밤 기온이 영하 10도 안팎을 넘나들 던 때였다. 아름답던 달빛의 시골길도 이날따라 차가워 보였다.

내 인생에서 ‘삽질’은 꽤나 친숙한 활동이었지만 이번만큼 버겁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 방식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들지 않았다. 돼지들의 습성을 지켜주면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에는 톱밥발효돈사가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법적인 기준 내에서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톱밥산’에 절망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웃집 형님이 미니포크레인으로 도와주기도 하고, 하루는 내가 포크레인을 빌려다가 편하게 하기도 하면서 결국엔 80톤의 톱밥을 다 퍼넣었다. 삽질이 다 끝나고 꼭 모래밭같은 돈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 코로 땅을 판 것도 아닌데 코끝이 찡해졌다. 돼지들이 땅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쉬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돼지들이 신나서 뛰어다니면 좋겠다.

물론 주기적으로 똥을 뒤집어주고, 밖으로 꺼내줄 때도 심각한 노동이 예약되어 있다. 그래도 시작하는 단계에서 이토록 힘들게 톱밥을 넣은 건 일종의 통과의례가 아닐까 한다. 힘겨운 톱밥삽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우리가 왜 돼지를 키우기로 결심했고, 어떻게 키울 것인지 곱씹고 또 곱씹는 과정이었다. 코끝 찡한 톱밥발효돈사의 시작은 이러했다.

2018년 12월 26일 한겨레 애니멀피플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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