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과거 비잔틴 제국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는 수도였고, 오스만 제국시대에도 수도였던 중요한 도시다. 그 이스탄불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술탄아흐맷’이라는 곳. 남북으로 뻗어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편, 그러니까 유럽쪽 지중해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중요한 만큼 유적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여행자를 위한 각종 식당과 숙박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나 역시도 그곳의 조그마한 여행자 숙소에 머물렀다. 짧은 이틀동안 병원문제로 그 곳 관광을 하지 못했고, 병원을 다녀와서는 빨리 자전거 페달을 다시 밟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려 떠나기전 단 두 곳,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만을 둘러보았다.
숙소에서 걸어 5분도 채 안되는 곳에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가 있었다.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도였던 탓인지 그 주변의 도로는 돌이 촘촘히 박아 만든 것으로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둘은 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항해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 블루모스크를 지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둘 사이에 서서 번갈아 보니 최근에 지어진 블루모스크에 훨씬 눈길이 갔다. 성 소피아 성당도 멋지고 웅장한 건물이긴 했지만 일단 외벽에 장식된 거대한 붉은 터키국기가 거부감을 일으켰다.
더 멋져 보이는 모스크를 먼저 들어갔다. 이슬람 신자를 위한 출입구와 관광객을 위한 출입구를 따로 두어 구분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 들어간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넓고 웅장했다. 높고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이 몇 개가 이어져 연결되어, 거꾸로 된 거대한 ‘엠보씽’을 떠올리게 했다. 인도나 파키스탄의 모스크는, 건물 보다는 건물 전면의 광장을 넓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이 모스크는 그 넓은 광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족히 천명은 넘는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만한 넓은 공간이었다. 조그만 창들에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꾸며져 넓은 실내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고, 나머지는 다 관광객이었다. 앉아서 조용히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안내원을 둘러싼 설명을 경청하는 수십명의 단체관광객들, 이러 저러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래잡기를 하는 어린이들, 좋은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메우고 있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비교적 늦게 발생되고 전파되었기 때문에 사원의 모양이 거의 비슷할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처음 본 사원이 모스크의 ‘기본형태’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란에서 조금 달라진 모스크에 다소 놀라고, 터키에서 이 블루모스크를 보면서 ‘역시’ 라는 생각을 했다. 늦게 발달한 종교라 할지라도 전파되며 그 문화에 융화하는 것이다.
침침하고 답답한 그곳을 빠져나와 성 소피아 성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과거의 비잔틴 제국시대에 중요한 성당이었고, 오스만 제국시대에는 모스크로 용도변경, 20세기 들어와서는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가 모스크, 박물관’ 이라고 해야 정확한 명칭? 모스크와는 다르게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입장료를 비싸게 받고 있었다.
그런만큼 기대를 안고 내부로 입장. 그러나 내부 중앙에 쇠파이프로 엮어진 높은 탑이 쌓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쪽 벽면과 천장을 보수하는 듯 보였다. 내부의 면적은 블루모스크 보다 다소 좁게 느껴졌지만 건물 높이는 훨씬 높아보였고, 더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위대한 성당이라고 꼽히는 건물이라지만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봐서, 보수중인 건물을 꼼꼼히 느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층 한쪽 벽면과 심지어 천장에 금빛을 발하는 모자이크를 보고서는 입을 열고 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과 그 주변인물들의 모자이크였다. 그곳에 비친 인공조명이 반사되어 그런 것이긴 했지만, 그 빛나는 모습은 ‘신성’ 그 자체였다.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성경으로 보이는 듯한 책을 끼고, 머리 뒤쪽으로 오로라가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은 누가봐도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것 이외에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의 모자이크도 있었고 다른 것들도 있었다. 기독교에서 신성시 하는 인물 다수를 비슷하게 신성시하는 이슬람교이었던 탓인지 파괴가 덜 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사원내부에 우상을 두지못하게 되어있는 이슬람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휴~’. 오스만 제국 시절 많은 건축가들이 소피아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또,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가 이 성당의 이름을 따온 정도로 이 성당은 위대했으니, 아무리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사람이었을지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자이크에 반하여 눈은 똥그래지고 입은 ‘턱’, 고개는 끄덕끄덕 거렸다. 그제서야 성당이 다시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의 아름다움은 알지 못했지만 위대한 성당임에는 분명했다. 2층의 난간에 커다랗고 동그란 나무에 아랍어로 된 글자가 적혀진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이 모스크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줄 알았지만, 별 관계없어 보이는 어린이들의 작품들만 전시되고 있었다.
그 외 아주 유명한 유적지들이 많이 있었다. 여행기를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리 멋진 이스탄불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그저 떠나고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하루동안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흑해연안까지 자전거로 다녀오는 것과 타이어를 유럽의 좋은 도로와 어울리게 도로용으로 바꾸는 일, 변속기와 브레이크를 손질 한 후 미련없이 떠났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