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유럽연합)의 국가로 입국도 큰 수고로움은 없었다. 그저 여권만 확인하고 입국도장만 찍었을 뿐, 세관검사나 인터뷰 같은 것은 없었다. 터키 역시 자유국가이긴 했지만 무슬림에 대한 부담스러운 감정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남아있었던 것인지 마을마다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교회를 보니 새삼스럽게 기뻤다.
첫 번째 도시 ‘알렉산드로폴리’로 향하던 길. 갓길이 좁은 도로를 지나다 마주오는 차량과 뒤따라오는 차량, 그리고 나의 자전거가 동시에 지나는 상황이 있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수도없이 겪은 상황. 때로는 큰 트럭들이 마주칠 때는 트럭측면과 나의 핸들이 부딪칠 것만 같아 긴장을 해야만 했다. 큰 트럭이 끌고오는 바람이 자전거를 휘청거리게 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그 순간에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마주오던 차량이 지나도록 뒤에서는 아무소식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뒤따라오던 차량이 멈추어 선 것이었다.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기이하게’ 느껴졌다.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됐다. 그래도 빵빵거리거나 불만섞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천천히 멈추었다 다시 가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말도안돼, 믿을 수 없어! 너무 안전하잖아!’.
첫 번째 도시 ‘알렉산드로폴리’에 도착해서는 대형 마켓을 발견했다. 마켓으로 뛰어들어가서는, 막 잠에서 깨어난 맹수가 사바나를 누비며 먹이감을 찾아 방황하듯 구석구석 누볐다. 지금까지 거의 보지 못했던 신선한 우유하며, 두텁게 썰린 돼지고기하며, 나의 눈을 동그랗게 만든 삼겹살까지. 각종 파스타 재료와 다양한 종류의 야채, 냉동생선까지 있었다. 고기와 야채 등등을 한봉지 가득 사들고서 야영장으로 향했다.
5월 말, 다소 쌀쌀한 날씨여서 사람이 거의 없을 줄로 알았다. 일반적인 한국의 해변 야영장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빼곡이 들어찬 캠핑카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나무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는 야영지 속에 캠핑카들이 수도없이 들어박혀 있었다. 각모서리에는 전기가 다 들어와 있어 연장선만 있으면 언제든지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거의 호텔수준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때되면 밥먹고,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일광욕을 즐기고, 씻고 밥먹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책을 읽었다. 대부분 중노년층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다음 도시의 야영장에서도, 그 다음에서도. 우리나라의 노년층은 공원에 나가, 노인정에 앉아서 바둑두고, 장기두고, 대화하는 것이 일반이라고 생각했는데, EU의 노년층은 다들 캠핑카 하나씩 끌고 다니며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힘들면 몇일씩 쉬고를 반복하는 것이 일반이라고 생각됐다. 길위를 달릴 때도 수십대씩 마주쳤고, 야영장도 캠핑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부부나 커플들은 캠핑카는 아니더라도 승용차에 한가득 짐을 싣고 다니며 야영지를 찾아다녔다.
까발라시의 야영장에 도착했다. 도시 외곽 외딴 곳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과 수영장을 갖춘 해변야영장이었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는데, 고급시설에 가격이 비쌀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멀리에 있던 주인은 자전거 타고 왔다는 소릴 듣고는 직원에게 돈을 받지 말라고 얘기했다.
“사장님이 몇일정도는 괜찮으니까 원하는 만큼 있다 가래요.”
“네?? 정말요?? 고마워요!!”
자리를 배정받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다른 자리에 낯익는 얼굴이 있었다. 새하얀 백인소녀였는데 도무지 어디서 만났는지는 기억이 안났지만, 일단 인사했다.
“헬로우~ 우리 어디서 만났죠??”
“몇일 전 알렉산드로폴리에서 만났잖아요? 여기까지 자전거타고 오신거에요?”
“네, 이틀걸렸어요.”
그녀는 독일에서 온 소녀 ‘아니키’였다. 이미 그녀는 네델란드 노부부와 합석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인사만하고 지나친다는 것이 밤늦도록 그곳에 앉게 되었다.
“혼자서 이렇게 다니는 거에요?”
“네, 그냥 여기저기 다니고 있어요. 바다나 산,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그곳에 가요”
“잠은 이렇게 텐트치고 자구요? 여자혼자서? 야영장에서만 자요?”
“네, 혼자 텐트치고 자요. 야영장 뿐만아니라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자기도 해요.”
아니키는 배낭을 메고 걷기도 하고, 버스나 기차를 타기도 하면서 여기저기 한가로운 바닷가를 찾아다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그에 대한 감상을 적고,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차가운 바닷물에 혼자 수영하고, 일광욕을 한다고 했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20살. 친구들과 한참 어울릴 나이에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왜 혼자서 여행하는거에요? 외롭지 않아요?”
“가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아름다운 곳에서 감상에 젖는것이 너무 좋아요.”
야영한 곳을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들이었다. 자전거로 가더라도 찾아가기가 힘든데, 그녀는 소도시 내의 지방버스(마을버스)까지 이용해가며 그런 곳을 찾아냈다.
보통 배낭여행 하면,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유적지를 돌아보고 여행자 숙소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인데, 그녀는 전혀 다른 형식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관광지 중심이 아닌 자연 중심의 여행이었다. 유럽 내 풍경이 괜찮은 곳에는 의례 캠핑장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는 캠핑장은 특별히 필요없다는 입장이었으니, 캠핑장이 있든 없든 어디든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은 모든 곳이 그녀의 여행지였다. 자전거 여행을 하며 내세우고 싶은 것이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녀는 자전거 없이도 그러한 여행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야영하는 사람이 많아 야영장이 많이 생긴것인지, 야영장이 많아 그런 것인지 수십년 전부터 이런 곳들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듣고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네델란드 노부부는 유럽전역에 퍼져있는 야영장 목록이 담겨져 있는 두꺼운 책도 가지고 있었다.
“우와, 이게 다 야영장이에요??!!”
“네, 몇 년 전건데 지금은 조금 바뀌었을거에요.”
그들은 우리나라 현대차 ‘스타렉스’를 개조하여 다니고 있었다. 짐칸을 주방과 침실로 꾸며놓았다. 굉장히 좁은 공간이었지만 없는게 없을 정도였다. 파키스탄 야영장에서 몇몇 자동차 여행자를 보았지만 거의 야영차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개조해서 다니다니!
“어디어디 가보셨어요??”
나의 물음에 아저씨는 지도를 꺼내보였다. 조금 묵은 지도도 있었고, 새 것 같은 지도도 있었다.
“여기 선으로 그어놓고,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이 우리가 가본 곳이지.”
유럽 각 나라별 세부지도였는데,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다. ‘아니 이것을 얼마동안 다닌거야?!’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충의 느낌으로 그들은 노후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의 휴가가 아니라 1년에 몇 번씩 이렇게 나오는 것 같았다.
“이 자동차가 고생을 많이 했지~”
그만큼 유럽은 야영장이 많고, 그만큼 손님도 많다는 뜻이었다. 고급스럽고 깨끗한 집에서 살다가 텐트를 가지고 야영장을 찾아, 슈퍼에서 고기를 사냥하고, 바다에서 낚시하여 숲속에서 불 피워 음식을 하는 모습은, 과거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보고자 하는 것인지, 희한한 조화였다. 바닷가에서, 숲속에서 신선한 공기와 물을 접하며 휴식을 하는 것이 생의 활력으로 작용한다면, 앞으로의 우리 도시도 그렇게 만들어 가야한다는 강력한 뜻인 것 같았다.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안고쳤습니다. 책이 절판되어 글과 함께 사진을 더 붙여서 올리고 있습니다.